[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⑦안덕면 광평리

[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⑦안덕면 광평리
넓은 면적에 화전 농업 성행… 혹독한 세금으로 고통
  • 입력 : 2023. 10.05(목) 00:00  수정 : 2023. 10. 05(목) 16:46
  •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19C 후반 제주는 민란의 시기
과중한 화전세로 고통 시달려
화전민들 반감… 민란 잇따라
4·3 당시 마을 소개 집터 사라져
오늘날 화전 전통 잇는 시도 눈길


[한라일보] 제주 역사에 있어서 19세기 후반은 민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강제검 난(1862), 방성칠 난(1898)이 연이어 일어나 민심은 흉흉했다. 민란은 목장세, 화전세 등 과중한 세금이 원인이었다. 화전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대정현 화전민들이 대거 민란에 참여하고 일반 농민들도 호응했다. 그만큼 화전이 중요한 농업이었고, 이 일대에서 광범위한 면적에 걸쳐 오랫동안 행해져왔다.

고려 말 목호의난 발발지인 호명목장 일대. 특별취재팀

제주지역에서 화전은 13세기 후반 몽골의 제주 간섭기에 조성되기 시작한 국영목장과 이를 토대로 조선시대 본격 설치된 10소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몽골의 국영목장 설치, 조선시대 10소장 등 마정사와 잇따른 민란은 제주 화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서귀포시 안덕면 광평리다.

광평리는 '한라산 아래 첫 마을'로 불리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이돈이오름(663.2m), 서쪽 돔박이오름(521.4m), 그 동쪽에 왕이메(612.4m)와 괴수치(558.7m), 족은대비악(541.2m) 등이 있고, 지대 또한 해발 500m 중산간 고지대여서 '한라산 아래 첫 마을'이라 했다.

이 마을은 몽골의 제주 간섭기에는 국마장이 조성될 정도로 광활한 평원지대에 터를 잡았다. 일찍부터 국마장이 조성된 이 일대는 '목호의난' 발발지이기도 하다. 목호의난은 고려 후기인 1374년 공민왕대에 제주도의 몽골족 목호(牧胡) 세력이 주동해 일으킨 반란이다.

서귀포시 산록남로 광평 입구 사거리에서 '광평로'를 따라가면 호명목장이 있는 곳 일대가 바로 목호의난 발발지다. 광평로는 '화전로'와 만나게 된다. 도로 이름이 '화전로'인 것처럼 이 곳 중산간 일대는 화전 마을이 곳곳에 자리했다.

이는 '제주군읍지 제주지도'에도 나타난다. 1899년(광무 3) 5월에 제작된 이 지도에는 화전동 9곳이 표시돼 있다. 이 가운데 화전동 3곳이 광평리를 포함한 대정현 지역 7소장, 8소장 일대에 집중돼 있다.

조가동 마을터를 둘러보는 취재팀, 주변은 대나무가 무성하다.

이런 연유인지 광평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화전세가 많이 부과돼 화전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1900년(광무 4년) 봉세관 강봉헌이 공토(公土) 집세(執稅)를 위해 작성한 '대정군각공토조사성책(大靜郡各公土調査成冊)'을 보면, 상천(上川境), 광평(廣坪境), 광청(光淸境), 서광청(西廣淸), 영남경(瀛南境)에서 화전세를 징수했다.

그중 광평리가 다른 마을에 비해 5배 정도 세금이 많았다. 광평 지경에서 321마지기 모초전(새왓)에 160냥 5전을 부과했다. 인근 마을인 상천(모록밧, 백록동) 지경 모초전 45마지기에 72냥 5전, 광청(현 동광리) 지경 모초전 63마지기에 31냥 5전, 서광청(현 서광리) 지경 모초전 66마지기에 33냥, 영남 지경 모초전 61마지기에 30냥 5전을 부과했다.

화전민들이 식수로 이용했던 행기소.

광평리에 세금이 많이 부과된 것은 일찍부터 목마장이 조성되고, 화전이 활발히 행해졌던 때문이다. 당시 화전민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도 과중한 세금과 부패한 관리에 대한 반감이 높았고, 결국 19세기 후반 민란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광평리 옛 이름은 '넙은곳','넙은술','넙은드르'이다. 이 마을은 19세기 말 이전 '자단리'(自丹里, 동서광리)와 '광청리'(光淸里, 광쳉이)에 속해 있었다. 1750년경 광평리 안쪽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조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 하여 '조가위', '조가궤', '조가동'이라 했다. 그 뒤 '몰통어귀', '감남굴', '모살목' 일대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 광평리는 화전민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뒤에 조정에서 광평리 지역이 축산 적지라 하여 국마장을 설치한 이후 마을 세가 커지기 시작한 마을이다.

광평리 역시 제주4·3의 아픔을 비켜가지 못했다. 이 마을은 4·3 이전에는 '조가동' 40세대, '마통동' 20세대, '감남물' 4세대, '모살목' 5세대 정도 모두 70여 세대가 살았다. 하지만 4·3으로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됐다. 이후 1955년에야 돌아와 조가동 입구인 고백이동산 앞에 살면서 마을을 재건한다.

조가동으로 가는 다리인 조가교.

오늘날 화전 마을의 흔적은 지명 등에서만 남아있다. 넓은 면적에 걸쳐 화전이 이뤄지면서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집터 등도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화전을 의미하는 '친밧', 옛 화전민들이 식수나 마소의 급수장으로 이용했던 '천흑둗', 숯 굽기를 했던 '숯굳동산' 같은 지명에서 드러난다.

조씨가 처음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했던 곳은 조가동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조가동은 고백이동산 앞 도로 건너편 창고천 상류를 건너면 나타난다. 창고천을 건너 조가동으로 가는 다리 이름이 '조가교'다. 비록 조가동 마을은 사라졌지만 다리 이름을 '조가교'라 할 만큼 화전 마을 광평리 역사가 오롯이 느껴진다.

화전민들이 만든 물웅덩이를 취재팀이 살펴보고 있다.

집터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대나무만 무성하다. 광평리 82번지를 중심으로 조가동 집터가 자리했던 곳은 경작지로 바뀌고 주변은 온통 대나무 숲이다. 대나무숲은 도로변을 따라 서영아리오름 기슭까지 들어찼다. 화전 마을 범위와 생활권이 그만큼 넓었다는 의미다.

이 일대 화전민들은 창고천에 형성된 물 웅덩이인 '행기소'의 물을 식수원으로 이용했다. 마을을 관통하는 창고천의 수림이 우거진 곳에 있는 행기소는 둘레가 50m 정도, 깊이는 2~3m 정도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데다, 지질경관적 가치 또한 뛰어난 곳이다.

광평리에서는 메밀, 조, 산디(육도, 밭벼). 피 등을 주로 재배했다. 이러한 화전 농업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체험할 수 있다. 마을에 '제주 메밀 체험관'이 들어서 메밀을 활용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진관훈 박사(경제학)는 "제주지역에서 화전농업의 전통을 현대화한 새로운 화전 문화 콘텐츠가 생겨나고 있다"며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곳이 한라산 아래 첫 마을인 광평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행정사회부장/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2260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