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벌어진 제주4·3사건은 제주 마을 공동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때까지 명맥을 잇던 중산간 지대 화전 마을 대부분이 이 무렵 사라졌다. 4·3 당시 제주도내 12개 읍면 165개 마을 중 57%에 달하는 87개 마을이 강제 소개되면서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4·3이 끝난 뒤에도 상당수가 복구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마을'로 불리는 이유다. 잃어버린 마을은 지난 2019년 기준 66개리의 134곳(자연마을)에 이른다. 대부분은 이전부터 화전농업을 겸했던 중산간 지대 마을이다. 제주의 화전 마을 대부분이 사라진 것은 4·3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종남밧 일대를 촬영한 1967년도 항공사진(출처 : 국토정보 플랫폼)이다. 아래 붉은 원 일대가 종남밧이고, 그 위쪽 붉은 원이 뱅듸못이다. 특별취재팀
종남밧(밭)도 그중의 하나다.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464번지 일대.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 종남동, 종남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1:50000 지형도에는 종남동(宗南洞)으로 나타난다.
4·3으로 평화롭던 공동체 폐허
이곳엔 4·3 당시까지만 해도 10여가구 50명 안팎의 사람들이 농사와 목축을 하며 살았다. 1948년 11월 20일 와산리 마을이 초토화되는 과정에서 불에 타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됐다. 이후 김 씨 등이 돌아와 10여년 정도 살았으나 그 뿐이었다. 무관심속에 마을 공동체는 사라졌다.
사진 가운데 숲지대에 종남밧 집터가 있다.
종남밧 집터 모습. 아래쪽에 통시(재래식 화장실)가 있다.
옛 마을터는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나무와 삼나무가 빼곡하다. 그 숲속에 폐허가 된 집터가 있다. 인기척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곳곳에 삶의 흔적을 품고 있다. 안거리와 밧거리, 통시(재래식 화장실), 올레 등이 그대로다. 돌담집은 일부 시멘트로 벽체를 보강했지만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역시 잃어버린 마을인 서귀포시 색달동의 천서동(냇서왓)과 닮았다. 깨진 가마솥과 옹기 등은 잊혀진 삶의 흔적과 비극을 끄집어낸다. 4·3 이후 돌아온 일부 주민에게 비극과 아픔만 남아있는 공간은 더 이상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 될 수 없었다.
1967년도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종남밧은 지금처럼 숲이 우거지지 않았다. 집터가 몇 군데 보이고, 집터 주변으로 소규모 밭들 이외에는 온통 초원지대이자 목장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종남밧 일대는 광활한 중산간 지대다. 이 일대 주민들은 예전부터 목축과 화전을 겸하며 살았다. 이는 종남밧이라는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 '종낭'
제주에서 '종남(종낭)'은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는 때죽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때죽나무는 숲이나 곶자왈, 오름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5월 무렵 꽃을 피우는데 꽃이 달려 있는 모습이 종을 닮았다 하여 종낭이라 부른다. 또 하나는 '말이나 소의 방목을 금하는 표식으로 세운 나무'를 뜻하기도 한다.
삼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올레가 남아 있다.
종남밧 주민들이 생활용수로 이용했던 연못.
경작하거나 목장으로 이용하는 곳에 '종남'을 세우면 소나 말이 드나들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표시다. 종남밧 일대에서 때죽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곧 금기 표시를 나타내는 '종남'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남이 세워진 밧(밭), 지경, 동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화전민들에게 중산간 지대는 개척의 대상이자, 약속의 땅이다. 주인없는 무주지를 선점해서 화전 경작이 이뤄지곤 했다. 그 너른 터전에 화전과 목축을 하기 위해 구역을 선점하고, 종낭을 세워 표시했던 생활상이 지명에 반영됐다고 보여진다.
중산간 지대에서는 노동집약적으로 생산성을 향상하기보다는 조방적 농업 위주로 화전 경작이 이뤄졌다. 중산간지대의 주요 재배작물은 피, 대두, 조, 메밀 등이었다. 메밀 등은 지금도 와산리, 대흘리, 와흘리 등지에서 행해진다.
목축문화유산도 오늘날 계승되고 있다. 종남밧이 있는 중산간 마을 와산리는 조선시대 조성한 국영목장인 10소장 가운데 2소장이 위치했다. 마을 주변에는 못뱅듸를 비롯 압통(종남밭물), 세시미, 금산, 원남선술, 황청물, 당세미물 등 연못이 많았다. 중산간지대 드넓은 목축지 등이 있어서 화전농업과 목축에 유리하고, 소규모 마을이 들어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목축과 화전 중심 생활상 간직
마을 사람들은 당오름 못뱅듸 팽나무 밑에서 백중제(百中祭)를 지냈다. 백중제는 우마(牛馬)의 번성을 기원하는 목축의례로 목축문화유산이다. 지금도 백중(百中·음력 7월15)시기에는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와산리에는 본향당인 '눈미불돗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제일에 산신놀이가 행해지기도 한다. 산신놀이는 수렵과 목축을 관장하는 산신 '백중와살'을 위한 놀이굿이다. 수렵과 화전이 주요 생업수단 이었고, 목축을 겸하는 오래된 생활상을 유지해 왔다.
종남밧 일대 잣벡담을 살펴보고 있다.
진관훈 박사에 따르면 이는 '입지론'적 화전발생이라 할 수 있다. 즉 농업과 목축을 교대로 하는(겸하는) 생산방식에 있어서 보다 유리한 생산기반 즉, 목장과 농경지를 선점하여 농축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이다. 농목교체방식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금의 종남밧 위치가 목축과 화경농업을 하기에 아주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소규모 마을이 형성 유지되었다고 했다.
잃어버린 마을 종남밧은 이러한 지난한 역사와 주민들의 옛 생활상, 화전사를 조명해야 오롯이 그 실체와 의미가 드러난다. 역사교훈의 장으로, 소중한 마을공동체 유산으로 제대로 기억하고 전승이 가능해진다.
<특별취재단=이윤형 선임기자·백금탁 정치부장·진관훈(제주문화진흥재단)·고재원(제주문화유산연구원)·오승목(다큐제주)>
<※ 이 기획은 '2024년 JDC 도민지원사업'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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