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 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 ② 능화동의 역사·생활상

[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 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 ② 능화동의 역사·생활상
화전민 삶의 애환·핍박과 고난의 제주역사 간직 [기획]
  • 입력 : 2024. 09.26(목) 03:30  수정 : 2024. 09. 26(목) 15:46
  • 이윤형·백금탁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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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한라산 고지대에 자리한 능화동 화전 마을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겐 일종의 베이스캠프나 다름 없었다. 한라산 북쪽 등정로 변에 위치해 있어서 이 곳을 통해 제주 목사와 유배인들이 종종 백록담 등정에 나서기도 했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할 만큼 오지이긴 해도 외부 세계와 고립된 공간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 이치카와 상키(市川三喜)가 1905년 한라산 정상등반과 채집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능화동에 머물렀던 데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이치가와는 당시 제주목 남문을 출발하여 능화 마을에서 40여 일간 머물렀고, 개미목과 왕관릉을 거쳐 백록담 정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다.



1898년 방성칠란과 연관


능화동 화전 마을은 1898년 일어난 방성칠(房星七) 난과도 연결된다. 민란을 주도했던 방성칠이 제주에 와서 머물렀던 곳이 능화동(菱花洞)이다. 원래 동학도인 방성칠은 전라도 화순 출생이다.

능화오름 정상부 아래 위치한 능화동 화전 마을 주변 모습. 식생 하부층이 거의 그대로 드러나 당시에는 경작을 해도 될 정도다. 특별취재단

그는 반봉건·반외세 운동인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1894년(조선 고종 31)에 강벽곡·정세마 등과 함께 남학당(南學黨) 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전라도에서 제주도로 왔다. 능화동에 거주하며 화전 경작을 했다. 이후 광청리, 즉 지금의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 지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광으로 옮긴 이유는 분명치 않다. 진관훈 박사는 "능화마을이 포교 등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에는 여러 한계가 있어서 동광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추론했다. 그곳에서 화전민을 주요 대상으로 포교하던 중 제주목사 이병휘의 화전세, 목장세 등의 과도한 수탈에 저항하여 민란을 주도하였다. 한 달여 진행된 방성칠란은 3년 후인 1901년 발생한 이재수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문헌기록과 역사적 사실들은 능화동 화전 마을이 적어도 19세기 후반 이전부터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주성을 출발하여 한천을 따라 오르는 코스로 한라산 등정에 나섰던 것을 감안하면 능화동에 사람들의 거주는 훨씬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능화동 화전 마을 사람들은 소를 방목하고 감자 등을 재배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이치가와 상키가 남긴 '濟州島紀行'(1905)에는 능화동 사람들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무성한 조릿대 속에서 확인한 집터.

이치가와는 1905년 9월 11일, '능화동에서 감자 한 말을 샀다'는 기록을 남겼다. 다음날인 12일에는 '능화동쪽으로 채집을 나갔다. 도중 숯 굽는데가 몇 군데 있었고, 아궁이 같은 것은 없고, 그저 땅 바닥에 2간 정도의 움푹 패인 곳이 있을 뿐'이라고 주민들의 주거생활상을 기록했다. 13일에는 능화동 주민 중에 안내자를 고용하려고 했으나 단 한 사람도 응해오질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이 추위에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가는 얼어 죽는다'고 했다고 썼다. 이어 그달 20일에는 '10시에 능화동에 도착하여 즉시 짐을 운반할 소를 준비토록 하고, 한 마리의 소와 지게꾼을 빌고 (산을) 내려갔다'고 했다.



감자 재배·소 키우며 생활


이 기록을 통해 당시 능화동 화전민들은 화전 경작을 통해 고산지대에 적합한 감자(지슬, 地實)를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전 가옥은 아궁이가 따로 없고, 땅바닥을 움푹 파서 2간(間) 정도로 만든 집에서 생활했고, 소를 길렀다.

일본식 자기가 흩어져 있는 모습.

제단으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

취재팀이 이곳에서 확인한 집터나 주변에 땅을 파고 조성한 인공 연못(집수정) 등이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한다.

이곳의 식생은 특이하다. 같은 지점인데도 집터 주변에서는 키 큰 교목과 조릿대가 무성하게 자라는 반면 좀 떨어진 남쪽 방면으로는 하부 식생이 발달하지 못했다. 서어나무와 단풍나무 등 키 큰 교목들이 숲을 이룬 가운데 하부층은 식생이 거의 없는 상태다. 식물이 분비하는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로 다른 식물의 생존이나 성장을 방해하는 타감작용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경작했던 곳이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바닥에 돌멩이들도 거의 없는 상태다. 드러난 표토층을 보면 당시 감자 등 경작이 충분히 가능했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전형의 대표적 화전 마을


이곳에는 화전민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흔적들이 확인된다. 오래전 술병과 일본식 자기가 깨진 채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산담을 두른 무덤도 2곳이 자리하고 있다.

지표면을 파서 조성한 인공연못을 취재팀이 살펴보고 있다.

능화오름 정상에서 확인한 인공구조물 흔적.

무덤 내부에는 큰 아름드리 왕벚나무가 자란다. 능화동 화전민들과 관련성은 알 수 없으나 무덤 상태로 보아 100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방성칠을 따르던 남학당 교도들이 천신제를 올렸던 제단으로 이용했음직한 커다란 바위 등도 눈길을 끈다. 인공연못은 집터 인근에서 2곳을 만들어놓았고, 북쪽으로 하산길에서도 1곳이 확인된다. 하천을 끼고 있음에도 깊은 절벽 탓에 물을 구하기가 어려워 물웅덩이를 파고 생활용수로 이용했다. 능화오름 정상부에서도 인공구조물을 설치했던 흔적이 나타난다. 타원형에 가까운 구조로 자연석이 1~2단 정도 남았다. 크기는 장축 12m, 단축 6m 정도다.

진 박사는 "산전(山田)형의 대표적인 화전 마을이라 할 수 있는 능화동은 열린 개활지라기 보다는 수비와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요새형 분지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관으로부터 정치적인 박해와 감시를 피해 한라산 골짜기 분지에 독립적인 방어태세를 갖췄으며,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화경(火耕) 농업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잊혀진 채 능화동 화전 마을은 한라산 등정로이자 화전민의 삶터로, 또한 19세기 후반 민란의 시기 핍박과 혼란의 제주 역사를 말없이 품고 있다.

<특별취재단=이윤형 선임기자·백금탁 정치부장·진관훈(제주문화진흥재단)·고재원(제주문화유산연구원)·오승목(다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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