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최근 개봉한 두 편의 한국 영화 '화란'과 '믿을 수 있는 사람'에는 발 붙이고 있는 지금을 견디기 어려운 이들이 등장한다. 살아가고는 있지만 의지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이들은 어딘가와 누군가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소망한다. 육화된 지옥도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김창훈 감독의 '화란'과 아무리 움직여도 끝나지 않은 여정이 이어지는 곽은미 감독의 '믿을 수 있는 사람'. 두 영화 속 그들은 왜 떠나고 싶어 하고 정착하고 싶어 할까. 무엇이 그들을 지금에서 살 수 없게 하고 어딘가와 누군가를 꿈꾸게 만들까.
'화란'은 축축해서 무겁고 흐릿해서 더 어두운 이야기다. 영화의 어떤 한순간도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이라는 가시화된 폭력의 울타리 안에서 발버둥 치는 고등학생 연규는 복지가 잘 되어있어서 누구나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간다는 나라인 화란(네덜란드)으로의 이민을 꿈꾼다. 하지만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돈을 모으던 그에게 현실은 쉽사리 손을 내밀지 않는다. 몸이 반쯤 잠긴 구렁텅이의 범위가 점점 더 넓고 깊어져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게 된 연규 앞에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이 예상하지 못했던 선의를 베풀지만 치건이 건넨 그 손을 잡는 순간 연규는 더 깊고 어두운 늪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 '화란'의 세계는 비정하다. 정 붙이고 살려고 하는 이들의 작심을 변심하는 냉정한 세계.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결과들이, 내 마음과는 다르게 타인에게 번지는 상처의 흔적들이 영화의 곳곳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불행이라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인물들 위로 내리고 그 불행에 젖어버린 몸과 마음을 말릴 해는 오래 떠 있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는 꿈과 지울 수 없는 실패들이 뒤엉킨 '화란'의 세상에서 영화는 끝내 누군가의 손을 대신 잡아주는 일을 선택하지 않는다. 선의로 해결할 수 없는 비대한 실체를 더듬던 영화의 손은 탄식과 함께 상처로 얼룩진 스스로를 마주하는 쪽을 택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눈보다는 귀로 더 또렷하게 들려오는 잘고 잦은 일상적인 마찰음들에 귀 기울이는 영화다. 주인공인 탈북민 한영은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더 나은 삶을 위해 매일을 바쁘게 살아간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내일을 꿈꾸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내일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울타리를 벗어나 온 힘을 다해 벽을 넘어온 한영에게 요구되는 것은 누군가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다. 노력해서 얻어지지 않는 것, 최선을 다한다고 주어지지 않는 것이 한영을 외롭게 하고 떠돌게 만든다. 가장 견고한 벽은 사람의 마음 안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 이방인의 몸과 마음,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 상태를 영화는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안내하는 가이드 맵에는 정작 한영이 가야 할 곳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나를 지금의 나로만 볼 수 없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영이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장소는 어쩌면 그 지도에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보다 어딘가에 더 나은 곳이,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지금과 여기에 만족하지 못해서 만은 아닐 것이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나를 부정하는 순간을 겪게 된다면 누구라도 떠나고 싶어 진다. 그 부정의 방식이 폭력이라면 이 소박한 소망은 탈출의 염원이 되기 마련이다. '화란'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인물들은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인물들이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지속될 수 있었다면, 망설임 끝에 나눈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발 붙인 땅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마음 아프다.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던 이들은 사실 그 어딘가가 아닌 바로 여기에서 나를 우리로 받아줄 타인의 마음 하나를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