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문화광장] 크롬웰, 의회와 왕의 권력

[김정호의 문화광장] 크롬웰, 의회와 왕의 권력
  • 입력 : 2025. 04.15(화) 06:4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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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우리가 지켜야 하는 안전 수칙은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졌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투쟁 결과이다. 현대 사회의 대통령과 의회 관계의 기원은 영국의 왕과 의회의 관계에서 기원한다. 미국 독립전쟁을 이끌고, 1789년부터 초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워싱턴은 그 당시 대통령의 임기 제한 조항이 없음에도 3선 권유를 거절했다. 임기에 제한이 없다면, 그들이 피해서 도망쳐 온 영국의 왕과 뭐가 다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영화 '크롬웰'(1970)은 의회 권력을 이끌고 영국의 왕 찰스 1세와 내전을 치른 뒤, 찰스 1세를 사형시킨 영국의 정치가이자 젠트리 계급·골수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영화다. 영국 의회는 1265년 왕의 자의적 통치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킨 쪽에서 기사와 시민 대표로 이뤄진 의회를 열었다. 에드워드 1세는 1295년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자로 구성된 대의회를 열었다. 1339년에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상원과 기사와 시민으로 구성된 하원으로 의회가 분리됐다. 법을 제정하고 세금을 더 부과하기 위해선 하원의 동의를 받아야 했고, 부패한 관리에 대한 탄핵권도 하원이 가졌다. 상원은 하원에서의 잘못된 결정을 시정하고 과세에 동의, 법률을 제정하는 역할을 했다.

1625년 2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예산 지원을 거부하는 의회를 해산하고 전쟁을 치렀으나 패배했다. 왕은 하늘이 내린다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인 찰스 1세는 어려운 재정으로 인해 의회가 요구한 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권리청원에 서명한다. 그 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던 찰스 1세는 1640년 스코틀랜드 반란으로 전쟁 비용이 필요하게 되자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점차 왕의 권리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1642년 왕은 일부 의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인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1644년 의회파와 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왕의 조카가 이끄는 왕당파 군대에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은 두각을 나타냈다.

1647년 왕이 항복해 의회의 연금 상태로 있게 되고, 나라는 정부 형태와 종교 문제로 혼란을 겪게 된다. 크롬웰의 신형 군대를 두려워한 의회는 그 군대의 해산을 명했지만 크롬웰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의회를 해산했다. 1649년 의회는 '법의 지배'를 받는 왕인 찰스 1세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영국 국민과 의회를 위협해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크롬웰은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원했으나 의회가 선거 없는 임기를 요구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자 1655년 의회를 해산했다. 이후 극단적 청교도적 생활, 즉 모든 놀이, 연극, 도박, 음주를 금지하면서 독재로 흐르게 된다. 1660년 크롬웰의 사후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으로 즉위하고, 영국은 입헌군주제의 방향을 나아가게 된다. 박형남의 책 '재판으로 본 세계사'는 이 사건을 보다 자세히 다룬다. <김정호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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