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대체로 좋은 인생

[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대체로 좋은 인생
  • 입력 : 2026. 02.11(수) 00: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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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일부러 아파트 길을 빙빙 돌아서 왔다. 어스름, 공터 구석에서 면벽하고 담배 피우는 양반, 내 눈은 못 피해. 오가다 급히 밟아 끈 장초를 볼 때부터 짐작했으니까. 딱 이즘, 보신각 당목에 실금 간 첫 달이 허물어지면 정초 작심했던 결심도 하나둘 틀어지고 무너질 때. 그렇다고 눈 피하며 너무 비굴해질 필요는 없다. 계획 몇 개 어긋났다고 인생이 무너지지는 않아. 이달이 지나 봄바람 타면 죄책감은 허공에 흩어져 살랑살랑 말라버릴 거니까.

1월 1일. 3년 묵은 TV에도 새해가 열렸다. 동튼 지는 오랬는데 화면에 갇힌 말 떼는 여전히 날뛰고 있다. 눈은 감았지만, 귀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꿈, 목표, 희망, 도전, 결심. 싫은 소리도 듣다 보면 세뇌. 소파에 드러누워 샅 긁던 몸이라도 일으켜야 덜 미안할 것 같아. 아주 잠깐 용을 쓰다가 말았다. 누가 고발할 것도 아닌데. 그런데 생각 머리가 백지장이네. 내게 꿈이 있을 리가? 생애 전체를 통틀어봐도 그래. 강제로 꿈을 가져야 했던 코흘리개 시절, 모두 대통령과 의사, 과학자를 써냈지만 나는 적지 못하고 대신 매를 맞았다. 꿈이 없었기 때문. 기억이 애매하지만 꿈꾸기 싫었을 수도 있었고. 커가면서 궁금했어. 그냥 살기, 살아지는 대로 살기, 결혼하고 애도 낳기, 아예 꿈 없는 빈칸은 왜 답이 안 될까? 누구에게도 묻지는 않았다. 매가 무서우니까.

어떻게 되긴? 아무도 원치 않던 소시민으로 살고 있지. 가끔 법 없이 사는 가증스러운 사람으로 둔갑도 하면서. 꿈이 없이 살아온 것도 어찌 보면 배짱이야. 그렇다고 아무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도리 있나? 별난 재주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 그저 쳇바퀴 돌 듯 살다 이게 인생이구나 생각할 수밖에. 그래도 돌아보면 몇 번만 울고 여러 번은 웃으며 살았으니 됐지 싶고. 늘그막에 조금 깨달은 게 있기는 하다. 게으르지만 않으면 좀 허술하고 부족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 없다는 거. 누구 말마따나 이 팍팍한 세상에 달걀 한 판 정도는 고민 없이 살 수 있으면 인생은 대체로 좋은 날이 많다는 거. 소시민의 삶도 꽤 괜찮다는 거. 그러니 꿈이 없거나 꿈이 깨지거나 꿈을 도둑맞더라도 괜찮다. 털고 일어나서 모처럼 햇살 좋은 겨울날의 오후를 즐겨도 돼.

그렇더라도 여포 잃은 적토마가 힝힝 우는데 이런 식의 배 째라는 옳지 않아. 그래서 고민 끝에 최소한으로 세운 올해 결심. 하던 것만 하자, 싫은 건 하지 말자, 미운 사람은 만나지 말자, 휴일은 방콕하자, 아프면 병원 가자. 개수만 많지 종합하자면 '별일 만들지 말고 별일 없이 살기'인데 아직은 순항 중.

담배 피우던 젊은 양반, 거듭 말하지만, 계획 몇 개 틀어졌다고 인생 깨지는 거 아니다. 아, 중간에 대통령 꿈에서 조기 퇴임한 녀석을 만났다. 계산은 당연히 대통령이, 밀감 판 연봉으로. <신순배 수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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