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제주에는 없는 게 많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형 백화점이 없고, 더 빠른 교통수단이 없으며, 다양한 문화시설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되물어야 한다. 제주에는 정말 모든 것이 다 있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생활의 편의를 넘어, 우리가 어떤 제주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없음을 채우는 것'을 발전이라 믿어왔다. 더 넓은 도로, 더 많은 시설, 더 빠른 연결은 삶을 나아지게 하는 조건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 끝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도시, 그리고 점점 흐릿해지는 제주다움이다. 모든 것을 채우는 순간, 제주는 더 이상 목적지가 아니라 대체 가능한 공간이 된다.
결핍과 부족함은 닮은 듯 다르다. 결핍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로, 삶의 존엄과 안전을 위협한다. 교육과 의료, 안전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반드시 채워져야 할 공동체의 책임이다. 반면 부족함은 다 채우지 않은 상태, 혹은 남겨둔 여백이다.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지켜내는 가치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 데 있다. 필요한 것은 늦추고, 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서둘러 채운다.
제주는 섬이다. 섬은 무한한 확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환경의 수용력, 물류의 한계, 생태의 균형은 분명한 경계를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요구가 쌓일수록, 제주는 점점 어디에나 있는 도시를 닮아간다. 이미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관광지는 넘치지만 머무름은 짧아지고, 도로는 넓어졌지만 이동은 더 빨라지지 않는다. 편의는 늘었지만 관계는 얕아졌다. 채움이 늘수록 제주가 줄어드는 역설이다.
부족함은 때로 전략이 될 수 있다. 느린 이동은 머무름을 만들고, 제한된 자원은 나눔과 절제를 낳는다. 과잉의 편리함 속에서는 관계가 얕아지고 사유가 짧아지지만, 부족함은 서로를 찾게 하고 삶의 결을 깊게 만든다. 제주 공동체의 온기는 어쩌면 이 '부족함의 시간' 속에서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부족함을 미화할 수는 없다. 부족함을 방치한 채 '제주의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구분이다. 결핍은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 그러나 욕망까지 모두 채우려는 순간, 공동체는 방향을 잃는다. 제주에 필요한 것은 더 채우는 계획이 아니라, 어디까지 채울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다. 외부의 속도를 좇는 대신, 제주의 속도를 선택할 용기가 필요하다.
부족하지만 충분한 사회, 이 모순처럼 들리는 명제야말로 제주가 현실적으로 선택해야 할 길이다. 제주의 길은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관계와 의미를 키워가는 사회여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는 순간, 제주는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제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제주는 덜 가짐으로써 지켜진 곳이기 때문이다. <문만석 한국지역혁신연구원장·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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