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먼저냐 오름이 먼저냐
[한라일보] 극락세계도 아니요, 사찰 극락사와도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극락오름이라 했나. 극락오름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표고 313.5m, 자체높이 64m인 오름이다. 정상에서 북서 방향 직선거리 약 2㎞ 정도에 항파두리성이 보이고, 역시 같은 방향으로 약 5㎞에 애월읍 수산리의 수산봉이 보인다. 분화구는 북서향으로 넓게 벌어져 전체적으로 말굽형을 이룬다. 분화구 가운데쯤에 검은 지붕 건물이 있는데 극락사라는 절이다.
이 절엔 오름의 북서쪽에서 들어오는 길이 있다. 지금은 현대식 다리가 놓여 출입에 불편이 없으나 오름에 진입하기 바로 직전 깊은 계곡이 가로막아 과거에는 아주 불편했을 것이다. 이 계곡은 오름의 북동쪽 약 1.4㎞ 지점에서 발원해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하귀2리 바닷가로 흘러드는 소왕천이다. 이 극락사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의 이름은 '생굴물'이다. 샘이 솟아나 골을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극락오름. 분화구 가운데 검은 지붕 건물이 절이다. 김찬수
이 오름의 지명이 불교적 색채가 진해 보이는 극락오름이고, 이 오름에 있는 절 이름도 극락사여서 오름 이름이 먼저인지 절 이름이 먼저인지 아리송하다. 어떤 이는 옛날 이 오름 북서쪽에 극락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래서 극락오름이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라 여겨진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이상향인 극락세계가 오름에 전이돼 극락오름, 한자로는 극락악(極樂岳)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표현한 예도 볼 수 있다.
300년간 쓰던 이름
이 오름은 어쩌다가 이렇게 불교에서나 쓸 만한 지명을 얻었을까? 17세기말경에 제작된 지도 탐라도에는 극락악(極落岳)으로 표기됐다. 1703년에 만들어진 탐라순력도라든가 18세기 초반기에 나온 제주삼읍도총지도, 이후 1750년(영조 26)경에 제작된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까지도 그대로 극락악(極落岳)으로 표기했다. 그러던 것이 1872년 제주삼읍전도, 1899년에 나온 제주지도, 그러니까 19세기말에 들어와서 극락악(極樂岳)이라는 표기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극락사(極樂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일까? 1928년 애월읍 유수암리 극락오름 인근에 창건됐던 극락사가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진 바 있다. 현재 여기에 있는 절은 이후에 만들어진 절이다. 그러므로 극락오름이라는 지명은 극락사라는 절이 창건되기 전 300년 이상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오름의 지명은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없다.

오름 입구의 계곡. 다리 위쪽 지경에 샘이 있다. 김찬수
그렇다면 '극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극락(極落)' 혹은 '극락(極樂)'이라는 한자로 표기된 '극락'이란 'ᄀᆞ래기'의 한자표기다. 이 한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그저 음만을 취한 표기 방식이다. 즉 음가자 표기 방식이다. 이 말은 원래 골짜기가 있는 오름이라는 뜻으로 'ᄀᆞᆯ애기'라 했을 것이다. 이것은 제주도의 지명 표기에서 흔히 보인다. 'ᄀᆞᆯ'이란 '곡(谷)'을 지시하는 고유어다. 이 말은 '골'의 연음 'ᄀᆞ르'에 명사형 접미사 혹은 어조사라고도 불리는 '기'가 붙은 말이다. 여기에 'ᄀᆞᆯ'이 덧붙으면 'ᄀᆞᆯᄀᆞ르기'가 되고 'ᄀᆞᆯ'의 'ㄹ'이 탈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ᄀᆞᄀᆞ르기'로도 된다. 이중첩어형 지명이다. 'ᄀᆞᄀᆞ르기'는 어두음 경음화와 사이시옷(ㅅ)이 붙어 'ᄀᆞᆺᄀᆞ르기' 혹은 'ᄁᆞ끄래기'로도 발음됐을 것이다. 이런 형태가 바로 전 회에서 다룬 '갓그래기오름'과 그 전회에서 설명한 '까끄래기오름' 지명이다.
까끄래기·갯거리는 ‘골’
실제 언어생활에서 제주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제주인에게서 'ᄀᆞ르기' 혹은 그 외 이와 유사한 발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 적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기록자는 궁리 끝에 '극락이(極落이)'라고 적은 것이다. 여기서 '극(極)'은 현실발음을 실제 이렇게 들었을 수도 있고, 어두음 '그'를 위해 차용했을 수도 있다. '락(樂)'이란 '락이'를 씀으로써 '라기' 혹은 '래기'를 나타내려고 한 표기다. 결국, 이 표기는 'ᄀᆞ래기' 혹은 'ᄁᆞ끄래기'의 한자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예는 대표적으로 조천읍 교래리 표고 429m, 자체높이 49m의 까끄래기오름을 '가질극라지악(可叱極羅只岳)'이라 표기한 데서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질(可叱)'이란 '갓'을, '극라지(極羅只)'란 '그라기'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지(只)'란 지명표기에서 '기'를 나타낼 때 관행적으로 쓰는 글자다. 이렇게 표기한 문헌은 이 오름을 '극락악(極樂岳)'이라고 표기한 바로 그 1703년의 탐라순력도다. 극락악(極落岳) 혹은 극락악(極樂岳)이란 'ᄀᆞ라기'를 표기한 것으로 골이 있는 오름이란 뜻이다. 여기서 '골'이란 샘을 지시한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한편, 한림읍 명월리에도 갓그리오름 혹은 갯거리오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있다. 본 기획에서 이 오름 지명을 기울어졌거나 비스듬한 오름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북방 고대어에서 '갯'이 '비스듬한' 혹은 '기울어진'이라는 뜻의 어휘가 있고, '거리' 역시 '작은 산'이라는 뜻을 갖는 어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탐사에서 골(샘)이 발견되는 등 새로운 현장 상황과 언어학적 자료들이 추가되면서 당시의 설명이 잘못됐음을 알게 됐다. 이 지명 역시 골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으로 수정하며 독자들의 이해를 구한다.
한편, 그 바로 옆에 이어져 있는 오름을 선수오름 혹은 선소오름이라고 한다. 이 '선수' 혹은 '선소'는 샘이 있는 오름을 의미하는 고유어다. '선'이란 고대어 '설'의 변음 '서'에서 기원한다. '소' 혹은 '수'는 봉우리를 뜻한다. 샘이 있는 오름이란 뜻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본 기획 갯거리오름, 갑선이오름, 설오름 편 등을 참조하실 수 있다.
극락오름이란 극락세계라거나 이곳 사찰 이름 극락사와 관련이 없다. 직접적으로는 'ᄀᆞ래기'에서 기원한 지명이며, 골(샘)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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