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가을의 중턱, 가로수 잎이 나뒹굴고 감귤은 노랗게 익어간다. 그러나 바닷속은 봄이다. 어린 톳이 돋아나고 모자반은 새 가지를 뻗는다. 미역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잎을 준비한다. 전복과 보말을 비롯한 온갖 생명이 저마다 계절을 준비한다. 그런데 요즘 제주바다는 다르다. 울창했던 해조 숲이 사라지고 허연 바위가 속살을 드러낸다. 그곳에 살던 생명체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다와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 해녀들의 말이다.
'제주학연구센터'는 지난 2020년 남원읍 위미리를 시작으로 귀덕리, 신천리, 일과 1·2리, 신흥리, 사계리 해녀들의 삶을 구술채록해 '해녀와 마을 이야기'를 펴냈다. 올해는 성산읍 시흥리에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이 책은 반세기 넘게 바다를 일터로 삼아 살아온 해녀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바닷속 지형과 그곳에서 채취했던 생물 그리고 마을의 갖가지 이야기, 그것도 이제는 듣기조차 어려운 제주어로 풀어내고 있으니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육지의 밭과 같은 바당왓(바다밭)에는 구석구석 이름이 있다. 자갈과 돌덩이가 많다고 '머흘왓', 암박인 '엉'이나 '덕', 넓은 바위라 해서 '너븐빌레', 바다로 길게 뻗은 '코지'도 이름이 다 있다. 자리돔이 많다고 '자리거르는여', 물질 잘하는 금덱이만 들어갔다는 전설을 간직한 '금덱이여', 바위가 갈라졌다 해서 '갈라진여', 차가운 용천수가 솟아나 여름이면 게역(미숫가루)을 타 먹었다는 '언물개', 검은 돌이 많아 고기 많은 '볼락여'에 이르기까지.
해조류를 채취하는 일은 '자문다'고 하며, 전복과 소라 등을 잡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나오기도 하는 물질을 '허물, 헛물'이라 했다.
3월 '해경, 허채'로 미역 채취가 시작된다. 해녀들은 미역을 자물고, 남편과 가족들은 그것을 받아 나르는 '마중'을 했다. 마당에 보리짚 등을 깔아 말려 묶어서 상인에게 넘겼다. 그렇게 자식을 공부시키고, 밭도 샀다.
전복 껍데기도 쓰임새가 달라 암전복은 밥주걱으로, 속이 깊은 수전복은 멸치를 조리는 그릇 대용이었다. 지금은 귀한 성게도 귀찮다고 쪼아 던지는 시절이었다. 커다란 엉덕 아래에서 전복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도 봤단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 이야기다. 톳도, 미역도 예전 같지 않고 전복과 구젱기가 붙어 꿈틀거리던 바위도 휑해졌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물에 들고", "아이 낳고 사흘 만에 물질 나갔던" 바다는 여인들의 삶 자체였다. 그들이 기억하는 바다의 변화는 수온계와 통계, 과학만으로 읽어낼 수 없는 몸의 기록이다.
해조류가 사라지고 바위가 하얗게 드러나는 갯녹음, 바위가 허옇게 변하는 동안 우리는 육지를 메우고 오염물질을 흘려보냈으며, 바닷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
해녀의 주름에는 살아온 시간이 새겨져 있지만, 바다 허연 바위에는 우리의 미래가 새겨지고 있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송창우 제주와미래연구원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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