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21)잣성

[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21)잣성
중산간 드넓은 목초지의 이름없는 돌담
  • 입력 : 2007. 09.07(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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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중산간에는 잣성으로 부르는 돌담을 만날 수 있다. 성널오름 일대에서 확인되는 잣성./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1430년쯤부터 쌓은 기록

우마 관리·목장 경계용도

잣성 용어 70년대 공식화


제주섬 어디를 둘러봐도 돌담이 눈에 띈다. 해안가에서 저 멀리 한라산 근방까지 거무튀튀한 돌들이 자리를 지키고 섰다. 흔히 잣성으로 부르는 돌담이 있다.

지난달 29일 제주시 봉개동 쓰레기매립장 인근. 제주마(馬)문화연구소팀이 마문화 유적 답사지 개발을 위해 이곳에 있는 잣성을 찾았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돌담의 형태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동서로 길게 누운 형상이 짐작됐다. 하잣성(해발 150m~2백50m 일대의 잣성)이라고 했다.

같은 마을 회천관광타운 남쪽에도 잣성이 보였다. 장덕지 제주마문화연구소장은 이 잣성이 목장과 목장의 경계이면서 시·군 폐지 이전 조천읍과 제주시의 경계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처럼 길쭉하게 돌담이 형성돼 있었다.

"말을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제주도가 우마 기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자 소나 말이 많다는 뜻이겠다. 고광민 제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소나 말을 놓아기르기에 좋은 제주도의 입지 조건을 주목한다. 제주섬 이곳저곳에 폭우가 만들어놓은 여러 내(川)들은 방목할 때 천연적인 울타리 구실을 해낸다는 것. 섬의 완만한 비탈은 마소 먹이가 되는 풀이나 나뭇잎들의 싹트기와 시들기의 이동을 쉬이 관찰할 수 있게 만들어 제주도다운 방목기술을 낳았다.

지금과 같은 중산간 마을의 잣성은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0년경 제주도 출신 관료인 고득종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말은 운송 수단만이 아니라 전마, 외교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도 관설목장의 경관 연구' 논문을 쓴 적이 있는 강만익씨(교사)는 이와 맞물려 전국적으로 고려시대의 목장을 재건하거나 물과 목초가 많은 장소를 중심으로 목장을 신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섬 지역인 제주도에서는 목장이 해안지역에서 중산간 지역으로 확대됐다.

▲제주시 봉개동 쓰레기매립장 남쪽 목초지 부근에서 확인되는 테우리동산./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고득종은 이 무렵 목장을 중산간 지대로 이설할 것을 주장했고 해안지역과의 경계선으로 잣성이 등장한다. 나라의 정책인 만큼 잣성은 주민들을 동원해 쌓았을 것이다. 이른바 하잣성이 먼저 만들어졌다. 우마들이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상잣성은 우마들이 한라산 삼림 지역으로 들어가 얼어죽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18세기 후반부터 축조된 것으로 본다. 해발 350~400m 일대엔 중잣성도 보인다. 잣성의 높이는 대개 80㎝에서 1백50㎝에 이른다. 돌을 두 줄로 쌓아올린 겹담 형태가 많다. 길이는 1백m에서 5㎞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들 잣성은 제주도에 국영목장이 존재했음을 일러주는 유산이다. 일부 기업이나 개인 목장의 경계로 사용하는 잣성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이지만 상당수는 허물어지고 있다. 회천관광타운 인근 잣성을 찾았을 때도 돌을 빼간 흔적이 눈에 띄었다. 임자없는 돌담인지라 정원의 자연석으로 쓰기 위해 하나둘 잣성의 돌을 빼간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잣성을 제주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당장 사라지거나 희귀성이 있는 유산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도내에 분포한 잣성을 실태조사한 후 상징성이 있는 한 곳을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잣성이란 명칭은 혼란스럽다. 잣은 제주어로 '널따랗게 돌들로 쌓아올린 기다란 담'을 뜻한다. 성(城)이란 한자어와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을 노인들도 잣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알잣(하잣), 상잣, 담, 성 등으로 잣성을 칭했다. 달리 부르는 이름이 없었다는 노인도 만났다. 19세기'제주계록'에는 잣성이 '장원(牆垣)'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70년대부터 국립지리원의 제주도 지형도에 잣성이란 말이 등장하면서 이 용어로 굳어졌다. '새로운 신제품', '따뜻한 온정'처럼 동어를 반복한 잣성이란 용어가 어찌 어색하다.

목축문화 유산 관심 뒷전

김만일 관련 유적 등 문화재지정을…테우리 생애사에도 관심 기울여야


"어려려려러 오호야 어러러러 월월 하아야/ 이 몰들아 이 몰들아 쳇망으로나 돌아나들라/ 어려러러 호호옹옹/ 어러려려 어러려려 월월월하량…"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한필생(81)·김기봉씨(76)가 밭볼리는 소리를 구성지게 불렀다. 이들은 테우리('말과 소를 들에 놓아 먹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란 뜻의 제주어)였다. 한씨는 4·3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3년여동안, 김씨는 무려 30년간 마소와 함께했다.

이들은 '밭볼리는 소리'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한씨는 밭볼리는 소리가 좋아 테우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고, 김씨는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음력 5~6월쯤 소나 말 수십마리를 이끌고 내려가 밭을 밟는데, 대개 조밭에서 행해졌다.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도록 하는 일로, 이때 테우리들은 마소를 좇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즉흥적 노랫말을 담아 밭볼리는 소리를 불렀다.

일곱살때부터 시작해 30대 초반인 1960년대초까지 테우리였던 김씨는 한때 70두까지 마소를 관리했다. 3일을 집에서 잔다면, 석달은 중산간에서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테우리들의 생애는 고되다. 우마가 행여 남의 농작물을 해치면 한달치 일당을 모두 털어내야 하기 때문에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테우리들의 휴식처가 바로 테우리동산. 목지(목자)동산으로도 불리는 테우리동산은 잣성만큼 많았다. 제주시 봉개동 남쪽에 있는 목장 인근 우거진 수풀안에 수백년의 세월을 이어왔을 테우리동산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놓아 기르는 마소의 행적을 감시하고 잠시 눈을 붙였을 만한 공간이다.

제주 목축문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산은 다양하다.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월 '제주마의 역사유물 고증 및 문화재 지정화를 위한 학술조사'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헌마공신' 김만일 생가 복원 등 관련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보호하는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잣성 보존, '탐라순력도'를 토대로 진상용 말을 점마했던 관리 숙소인 교래리 객사 복원과 목축테마공원 조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화재연구소에서 언급한 유형 유산과 더불어 테우리들의 생애사를 통해 목축문화를 들여다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현재 남아있는 테우리들이 고령인 탓에 서둘러 구술 채록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들의 일생이 더해지면 제주목축문화사도 한층 풍성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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