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2)-① 동굴결혼식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2)-① 동굴결혼식
'세기의 동굴결혼식' 통해 만장굴 널리 알려
제1부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 입력 : 2009. 01.14(수)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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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굴을 최초 답사하고 명명했던 부종휴 선생이 생전 만장굴을 조사할 때의 모습. 맨 왼쪽이 부종휴다. /사진=유족 제공

만장굴 처음 발견·명명 부종휴가 주역
최초 동굴이벤트… 주례는 만농 홍정표
암흑속 촛불결혼식 입소문타고 유명세


40여년 전인 1968년 5월 어느 봄날. 이날 제주에서는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유명 배우들의 호화판 결혼식이 아니라 동굴 결혼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이며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 동굴결혼식의 식장은 바로 만장굴이었다. 주인공은 신랑 부종휴와 신부 이정희. 주례는 만농 홍정표. 많은 제자와 동료, 친지들이 이 세기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들었고 방송, 신문들은 취재열기로 가득했다. 이 결혼식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만장굴을 알리는 기폭제가 된다.

만장굴은 지금이야 매년 수십만명이 찾는 국제적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하 암흑세계'였다. 만장굴은 1967년 출입이 비공식 허용된 후 공개 개방된 것이 1970년대 들어서였다.

만장굴 결혼식의 주인공인 부종휴는 왜 하필 동굴결혼식을 올리게 됐을까. 그 해답을 만장굴의 최초 발견자요 명명자가 바로 부종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부종휴는 동굴결혼식의 사연을 제주도지 제59호(1973)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만장굴은 처음 필자가 발견한 굴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다.(중략) 1968년 필자는 재혼을 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다. 그래서 우연히 중앙일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한국동굴협회의 모임이 열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모임장소에 갔던 것이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회원들에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사유와 결혼식장 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한 바, 마치 그 모임은 강원도 석회암동굴답사에 대한 것이였고 보니 전 회원들은 '그러면 강원도 관음(觀音)굴에서 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었다. 그래서 주례는 박만규교수(제주도 식물조사시 수시로 부종휴와 동행했던 식물학자)로, 그리고 축사는 육여사께서 답사에 참가하게 되고 보니 진언을 하고 양해를 구하고 부탁을 드리는 것이 어떻냐고 하는 발언들이고 보니, 그리하기로 결정을 봤다."

부종휴가 언급하고 있는 중앙일보는 1966년 4월 경북산악회, 일본지하수연구회 등이 참가한 가운데 한일합동 만장굴 조사를 주도했다. 1967년과 1968년에는 한국동굴협회에 의해 조사가 계속됨으로써 만장굴이 세계적인 용암동굴로서의 진가가 속속 알려지게 된다. 부종휴가 당시 중앙일보를 방문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데 문화재관리국에 있던 장모씨가 극구반대 의견을 하는 요지가 '왜 자기가 발견한 만장굴을 두고서 강원도 굴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이냐' 그리고 '만약 만장굴의 발견자가 그 굴에서 동굴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만장굴은 널리 알려지게 될 것 아니냐'는 말이어서 나중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만장굴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부종휴의 만장굴 결혼식은 숱한 화제를 뿌렸으며 홍보효과도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혼식은 합창단의 축혼가와 더불어 친지, 수많은 제자와 기자들에 둘러쌓인채 진행됐다.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앞둔 지난 2006년 만장굴 내부에서 전개된 범국민 등재기원 서명운동 현장모습. /사진=한라일보DB

부종휴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암흑세계에 촛불을 밝혀서 백년해로의 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방송, 일간지, 주간지를 통해 전국에 보도가 되자, (중략) 만장굴이 크게 관심사가 되어 사굴만 찾던 관광객도 만장굴에 까지 찾아오게 되었고 장차 관광객들의 편리를 위해 국가에서도 적극적인 투자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나 관광객의 유치도 중요하지만 동굴의 보존은 더 중요하다는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동굴 결혼식에는 부종휴가 재임했던 김녕국민학교의 '꼬마탐험대' 대원들도 초대됐다. 꼬마탐험대는 스승인 부종휴와 함께 최초로 만장굴 탐사에 나섰던 주역들이다. 꼬마탐험대의 신순녕(76·제주시)옹은 "참으로 특별하고도 이색적인 결혼식이었으며 꼬마탐험대원들이 청객도 하고 잔심부름도 도왔다. 선생님이 워낙 어렵게 지내 제자들이 술과 안주까지 준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부종휴와 그의 만장굴 결혼식을 제안했던 문화재관리국 인사의 예상처럼 만장굴 결혼식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만장굴은 관광명소로 급부상했다. 만장굴 출입이 비공식 허용된 첫 해인 1967년 127명이던 관광객은 75년 11만명, 83년 55만명, 89년에는 130만명으로 100만명 시대를 열게 된다.

부종휴의 동굴 결혼식은 만장굴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암흑속 지하세계에 감춰져 있던 만장굴의 비밀을 밝혀내고 명명했던 주인공이 다시 그 동굴속에서 백년해로의 연을 맺었던,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한편의 소설, 영화가 이보다 더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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