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배움터를 가다/폐교의 어제와 오늘](5)용수초등학교 (1946~1995)

[옛 배움터를 가다/폐교의 어제와 오늘](5)용수초등학교 (1946~1995)
논과 밭 내놓아 일으킨 배움터 지금은 빗돌만 쓸쓸히
  • 입력 : 2011. 06.14(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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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용수초 가을 운동회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고산초에서 제공한 사진이다.

신흥의숙 토대삼아 인가 1949년 지금의 법기동 이설
통폐합 이후 용당·용수리에서 신창초·고산초로 통학


1986년 한경JC회장기 쟁탈 초·중등부체육대회 초등부 육상종합우승. 1992년 교육감기 제1회 장거리 달리기 대회 우승. 제주소년체육대회 남국부 800m 1위. 이런 문구가 또렷한 우승컵을 보고 있자니 운동장을 힘차게 내달렸을 용수초 아이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초 역사관. 1995년 폐교된 인근의 용수초 자료 등을 모아놓은 곳이다. 용수초 문패는 사라졌지만 학교의 어느 시절을 말해주는 오래된 앨범, 각종 대회 우승컵, 학사 보고 자료 등을 그곳에서 만났다.

▶1~4학년 '콩나물 교실'이던 시절

용수초는 한경면 용수리·용당리 아이들의 배움터였다. 이 지역 아이들은 학교가 생겨나기 전 마을에 따라 신창국민학교(1941년 개교)로, 고산국민학교(1945년 개교)로 통학했다. 한국문화원연합회제주도지회가 펴낸 '한경면 역사지'(2007)에 따르면 해방 이후 용수리 이민대회에서 국민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게 된다. 일제식민지하에서 운영되던 신흥의숙을 기본으로 1946년 설립 인가를 받았고 그해 11월 4일 용수초를 개교했다.

'용당리 향토지'(1991)에는 개교를 위해 애썼던 지역 주민들의 노력이 들어있다. 우선 신창국민학교와 고산국민학교에 다니는 1~2학년 학생을 용수국민학교로 전입시켰다. 이 때 2학년 학생수가 모자랐다. 할 수 없이 나이가 많거나 공부에 뜻이 있는 1학년 학생들을 2학년으로 편입시켰다. 다행히 개교 이후에는 신입생이 늘어나 1949년 용수리와 용당리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법기동으로 용수초를 이설하게 된다.

1995년 2월 용수초가 마지막 졸업식을 갖던 해의 학생수는 총 64명. 졸업생은 남학생 5명, 여학생 9명 등 14명이었다.

폐교되던 해를 기준으로 그보다 40년전쯤만 해도 용수초의 학생수는 세 곱절 많았다. 1958년 용수초의 학사보고를 보면 1~6학년 학생수는 230명으로 나타났다. 그중 졸업생은 29명을 차지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학생수가 늘어나면서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57년에 이어 1958년에도 1~4학년 학생들이 2개 교실을 절반씩 나눠 수업이 진행되면서 '아동생활에 혼잡성을 일으키고'있으니 개선해달라고 상급 기관에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찾은 용수초. 토지와 성금 기탁자의 명단을 새긴 빗돌(사진 위)너머로 잡풀이 우거진 옛 학교(사진 아래)가 보인다. /사진=진선희기자

▶"절부암 절개 기리며 굳세게 자란다"

용수초 입구에는 20개 가까운 빗돌이 나란히 서있다. 폐교 활용이 제대로 안돼 웃자란 풀들이 때때로 시야를 가리지만 거기엔 배움터를 키우고 지키기 위해 헌신한 이름들이 새겨졌다. 이두항, 현행길, 고유경, 박종학, 좌재웅, 좌재용, 좌재준, 고경생, 이기화, 양시원, 진기열, 서봉효, 홍상오, 고중생, 진기호, 김기학, 좌신생, 진행문…. 해방 이전부터 학교 발전을 위해 당시 1~2만원의 성금이나 수백평의 토지를 내놓은 형제, 부부, 여성 등 독지가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절부암의 굳은 절개 높이 기리며 굳세게 자라나는 우리 용수교'로 끝을 맺는 교가가 울러퍼졌던 학교는 45회까지 15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채 문을 닫는다.

1994년 3월, 용수초 학부모들은 이른 시간부터 학교 교무실로 모여들었다. 이날 분교장 격하냐, 통폐합이냐를 결정하는 정기총회가 열렸다. 용수초는 1993년 3월 이미 5개 학급으로 감축이 된 터였다. 학부모들은 스쿨버스를 운영해 아이들의 장거리 통학에 지장이 없도록 해달라는 주문사항을 달고 통폐합을 택했다.

지금 용수리에 사는 유치원~초등학교 6학년 9명은 고산초로, 용당리에 사는 초등생 7명은 통합운영학교인 신창초·중학교로 향한다. 용수초가 없던 해방 이전의 그 시절처럼.

용수 나비, 날갯짓 멈추다
운영난으로 '나비레' 폐관 예정


"10년이란 세월 동안 나비와 제주의 인연을 붙잡아왔지만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아쉽다."

제주시 한경면 용수초등학교에 '나비곤충전시관'을 마련했던 박노열 대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음성엔 착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박 대표는 옛 신창초등학교에 잠시 둥지를 틀었다가 2004년 용수초등학교로 옮겨 나비곤충전시관 '나비레'의 문을 열었다. 폐교 시설을 일부 고쳐 형형색색 국내외 나비의 모습은 물론 알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나비의 일생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2004년 수백종의 나비를 갖추고 관람객들과 만났던 '나비레'(위)는 현재 굳게 문이 잠겨있다(아래).

개관 초기엔 수백종의 자료를 갖춘 나비·곤충 체험학습장으로 청소년과 가족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박 대표는 "곤충 채집교실 등 용수리의 청정한 자연안에서 즐겁게 과학을 체험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찾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운영난이 닥쳤다. 나비를 테마로 한 대형 관광시설이 생겨나면서 경쟁력도 잃어갔다. '곤충의 보고'로 일컫는 제주에서 나비를 키우고 채집하는 활동을 방문객들과 함께 누리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차츰 현실과 멀어졌다.

임대료가 밀렸던 박 대표는 제주시교육지원청과의 소송 끝에 조만간 학교를 떠나야 하는 처지다. 그는 "그동안 수집한 나비 관련 자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전시관의 문을 다시 열고 싶다"고 털어놨다.

'나비레'는 현재 간판만 눈에 띌 뿐 굳게 문이 잠겨있는 상태다. 옛 배움터의 운동장은 잡풀로 뒤덮여 있다. '나비레'에서 사용했다는 운동장 한켠의 비닐하우스는 흉물로 바뀌었다.

제주시 용수향우회 좌창신 회장 "뜻있는 사람 힘합쳐 폐교에 다시 생기를"

"학교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맘이 편치 않았다. 하루빨리 문제가 해결돼 마을 발전을 돕는데 활용되었으면 한다."

제주시용수향우회 좌창신(사진·60·용수초 15회)회장은 잡풀만 무성한 채 제 빛을 잃어가는 용수초의 모습에 몇번이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몸은 고향 마을을 떠나있지만 마음은 유년의 기억이 어린 용수리로 향하곤 한다는 그는 "폐교된 것도 아쉬운데 남아있는 학교 건물마저 방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6년 12월 용수청년향우회가 펴낸 소식지 '절부암'창간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언젠가는 다시 용수국민학교가 문을 열어 우리 후배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졸업생들은 그 날이 꼭 올 것으로 믿는다."

좌 회장은 그같은 소망이 현실화되기는 어렵겠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옛 배움터에 생기가 돌아올 거라 여기고 있다. 향우회에서는 얼마전 절부암, 당산봉, 웃동네, 알캐, 해안도로 등을 도는 '용수리 둘레길'을 만들고 걷기 행사를 가졌다. 소박한 길이지만 마을 곳곳을 누비며 용수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용수리는 절부암, 김대건신부 제주 표착 기념관, 차귀도, 철새 도래지인 용수저수지처럼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라며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만큼 앞으로 학교를 주축으로 여러 사업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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