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떵살암수과]김영환 무공수훈자회 도지부장

[어떵살암수과]김영환 무공수훈자회 도지부장
"6·25 참전기념탑 없어 유감"
  • 입력 : 2011. 06.25(토) 00:00
  • 백금탁 기자 haru@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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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지부장은 "6·25전쟁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진=강경민기자

동료교사와 혈서지원… 도솔산 전투 산증인
나라사랑하는 국민은 '전쟁' 잊어서는 안돼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6월이면 먼저간 전우들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정전협정이 됐지만 아직 '전쟁'중이다. 호국의 달 6월만이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받쳐 싸웠던 선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6·25전쟁 61주년에 앞서 지난 22일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김영환(81) 지부장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1996년 퇴임전까지 40여년간 교직에 있었지만 앞서 6·25전쟁에 출전한 산증인이다.

김 지부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1949년 7월 성산초등학교에 초임 발령됐고 다음해인 1950년에 6·25전쟁이 났다. 당시 6학급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수석교사 1명을 제외하고 젊은 남자교사 4명이 전쟁터에 나가기로 혈서지원을 결의했다. 집결장소인 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지만 혈서지원한 우리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라가 있어야 학생이 있고 우리가 있을 것 아니냐'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 지부장은 이어 훈련병 시절, 인천상륙작전과 도솔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1950년 8월5일 20살의 나이로 입대했다. 모슬포에서 1개월간 매일 모슬봉을 점령하는 훈련을 받았다. 식사는 보리와 쌀이 조금 섞인 밥에 콩나물이 전부였다. 훈련 이후 전쟁터에 투입됐고 국제연합군(UN)과의 인천상륙작전과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제주출신 3·4기 해병대 3000여명이 이룬 공적이다. 그 활약상은 곧 제주사람들은 일명 '빨갱이'이라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에도 충분했다. '귀신 잡는 해병'라는 말도 그 때가 시초다."

전쟁 당시 가장 인상에 남는 전우는 누구냐는 질문에 김 지부장은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많은 형과 아우, 그리고 친구를 잃었다. 소중한 전우들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던 9월, 당시 김윤근 대대장과 김포로 가던 중 부평 인근에서 해병대 4기인 이수진 전우가 저격을 당했다. "수진아!"라고 불렀지만 말이 없었다. 심장 중심에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충격적이었다."

김 지부장은 가장 인상에 남는 전투는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 전투라고 했다. 이 전투는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꼽힐만큼 많은 희생이 따랐다. "1951년 6월4일부터 19일까지 17일간 벌인 사투 끝에 전략적 요충지인 고지를 점령했다. 미국해병이 하지 못한 고지점령을 제주출신 3·4기 해병대가 주축을 이뤄 성공했다. 9중대 3소대장인 제주출신인 김문성 소대장의 지휘아래 진격했다. 24개의 목표고지를 점령하는데 그 분수령인 13목표에서 소대장이 적으로부터 저격을 당했다. 김 소대장이 '꼭 점령해라. 명령이다'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김 지부장은 "6·25는 가슴이 아프고 온몸이 저리는 전쟁이다. 이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나라사랑하는 국민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년 퇴색돼 가는 전쟁의 흔적들…. 월남 참전기념탑은 있지만 유독 제주에만 6·25 참전기념탑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행정의 무관심도 크다. 남은 여생을 무훈담을 통해 자라나는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올바른 국가관을 심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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