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배움터를 가다/폐교의 어제와 오늘](7)가시초등학교 (1946~2001)

[옛 배움터를 가다/폐교의 어제와 오늘](7)가시초등학교 (1946~2001)
이웃마을과 합쳐 '농어촌현대화' 제3의 학교로 새출발
  • 입력 : 2011. 07.12(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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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초·화산초·하천초 3개 학교가 합쳐져 새롭게 문을 연 표선면 하천리의 한마음초. 올해 개교 10주년을 맞았다. /사진=진선희기자

4·3이후 폐교-분교장-본교 거쳐오다 학생 감소로 통폐합
화산·하천초와 시범학교 유치위 구성 2001년 한마음초로


수십 마리의 철제 군마가 초원을 내달리고 있었다. 제주 미술인들이 만든 '산마의 질주'란 설치 작품이다. 제주시 방면에서 가시리로 향하는 길에 그런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즈음 가시리는 마을에 이야기를 입히는 작업으로 분주하다. 일찍이 옛 가시초에 자연사랑미술관이 문을 연데 이어 근래엔 가시리디자인카페, 가시리창작지원센터가 자리잡았다. 마을회관 옆에는 가시리문화센터가 들어섰다. 문화공간만이 아니다. '말의 고장'가시리를 만날 수 있는 20㎞ 남짓의 '갑마장길'이 만들어져 도보 순례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신문화공간조성사업으로 변신중=가시리는 2009년부터 신문화공간조성사업을 시작했다. 도·농간 생활 격차를 해소한다는 취지로 정부 지원을 받아 첫 발을 뗀 사업은 이 무렵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김영일(54) 가시리장은 "작년 한 해 마을 인구가 70명쯤 더 늘었다"고 말했다. 2001년 가시초가 문을 닫았을 때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가시초의 60년대 수업 장면.

가시공립국민학교가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에 문을 연 것은 1946년. 가시리 역시 해방 직후 주민들의 교육열에 따라 건립이 이루어졌다. 인근의 성읍초나 표선초로 걸어서 등교했던 아이들이 학교로 모여들었지만 교실이 넉넉치 않았다. 초가로 된 향사를 가교사로 사용하거나 살림집을 돌며 수업을 했다.

이같은 어려움을 덜기 위해 교사 신축을 위한 기성회가 꾸려졌다. 기성회에서는 마을 청년을 중심으로 걸궁을 조직해 한달 넘게 집집을 돌며 학교 신축기금을 모았다. 하지만 신축 건물은 4·3의 소용돌이속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1949년 3월 가시초에 대한 폐교 결정이 이루어진다.

4·3으로 마을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학교 복구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어렵사리 화산초 가시분교장이 개교하며 가시초의 맥을 잇는다. 10년간 분교장으로 있던 가시초는 1960년 4월 국민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9월에 본교로 다시 태어났다. 1962년 첫 졸업생이 나왔다. 1971년에는 지금의 옛 가시초 부지로 학교를 옮겼다.

▲가시초는 2004년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가시리 입구에 설치된 '산마의 질주'.

▶4개 마을 중앙 하천리에 학교 신설=가시초도 '콩나물 교실'이던 시절이 있었다. 1971~80년에는 총 학생수가 300~370여명에 달했다. 1983년 8학급 편성이 이루어지면서 그마나 과밀학급을 해소시켰다. 90년대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학급당 10명 내외로 학생수가 줄었다. 마을에서는 폐교 위기에 몰린 학교를 지키려 학생 유치에 애썼지만 1998년 5학급이 편성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가시초는 40회 동안 13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2001년 2월 마지막 졸업식을 치렀다.

가시초의 통폐합은 여느 학교와 달랐다. 1999년 가시리, 세화 1리와 3리, 하천리 주민이 참여한 농어촌현대화시범학교 유치위원회가 꾸려졌다. 이웃한 화산초, 하천초 역시 가시초처럼 폐교를 눈앞에 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새로운 학교 유치를 원했다. 다시는 학교가 사라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비롯됐다. 제주도교육청은 4개 마을의 중앙에 학교를 세우자는 지역주민의 뜻에 따라 하천리 공동목장 부지를 사들였고, 40억여원을 들여 1년간 공사를 벌였다. 공모를 거쳐 이름을 붙인 한마음초는 2001년 3월 가시초·화산초·하천초가 통합한 제3의 학교로 그렇게 문을 연다.

제주 초가와 오름의 능선을 따왔다는 한마음초는 잘 지어진 학교 건물로 꼽힌다. 현재 4개 마을을 중심으로 109명이 재학하고 있다. 유치위원회 총무를 맡았던 강순배(55·하천리)씨는 "이틀만에 1000여명의 동의를 얻어 도교육청에 제출하는 등 새로운 학교 유치에 대한 열망이 컸다"면서 "중학교 진학까지 감안하면 4개 마을 학생이 다니는 한마음초를 세운 게 잘한 일"이라고 밝혔다.

폐교에 자리한 자연사랑미술관
문화공간이 마을을 바꿨다


학교가 사라지면 그 뿐, 폐교의 역사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옛 가시초에 들어선 자연사랑미술관은 다르다. 학교의 추억을 붙드는 흑백 졸업사진을 상설 전시해놓고 있다. 때때로 그 사진들은 가시초 동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자연사랑미술관을 찾은 어느해 졸업생들은 학창 시절로 돌아가 졸업사진을 다시 찍었다.

자연사랑미술관이 문을 연 해는 2004년. 1년간 공업사 야적장으로 운동장을 빌려주긴 했지만 방치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유리창이 파손되고 교실 바닥이 주저앉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폐교를 활용하기 위해 궁리했고 그것은 자연사랑미술관 유치로 이어졌다. 신문사 사진기자로 재직했던 서재철 관장은 이곳에 한라산, 포구, 해녀 사진 등을 풀어놓으며 마을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폐교를 변신시켰다.

▲자연사랑미술관을 찾은 관광객들이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다.

"덴마크의 사진가 부부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폐교를 이용한 미술관이란 얘기를 듣고 놀라워했다. 그들은 도내에 폐교를 활용한 문화공간이 얼마나 되며, 마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궁금해하더라. 폐교의 활용방안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 계기였다."

서 관장은 미술관을 꾸미면서 학교의 옛 모습을 해치지 않으려 했다. 학교가 학교다운 얼굴로 남아 있을 때 그 활용가치가 높아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최근 자연사랑미술관에서는 '40년전 제주의 풍물전'을 새로운 기획전으로 선보이고 있다. 폐교에 얽힌 기억을 놓치지 않듯, 40년전 제주의 삶과 풍경을 고스란히 불러낸 전시다. 조만간 폐교 한켠 카메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 조성 계획을 밝힌 서 관장은 "변변한 문화공간 하나 없던 가시리에 미술관이 생기면서 긍정적 변화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총동창회 김성숙 회장 "가시초 문 닫았지만 후배에 장학금 꾸준"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동문회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가시리 출신 초등학생들이 있는 한 총동창회도 남아있을 것이다."

김성숙(사진·51·가시초 13회) 가시초등학교 총동창회장. 표선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그는 "폐교 당시를 돌이켜보면 서운한 마음이 크지만 가시리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어서 언젠가 다시 학교가 문을 열길 기대한다"고 했다.

가시초 총동창회는 모교가 사라지던 해인 2001년에 '내사랑 가시교'를 냈다. 가시초에 얽힌 사연들을 자료집에 촘촘히 묶어낸 동문들은 문 닫은 학교에 대한 아쉬움을 그렇게 달랬다.

이들은 출범 초기부터 회비를 적립해 장학기금을 마련해왔다. 이 기금을 이용해 해마다 가시리 출신 한마음초등학교 졸업생에게 1인당 10만원씩 장학금을 전달한다. 대학생도 매년 2명씩 선발해 50만원씩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가시리를 고향으로 둔 인재를 키우는 일에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게 동문들의 뜻이다.

김 회장은 "일부에선 동문회를 존속하기 위해 가시리 출신 한마음초 졸업생을 회원으로 영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면서 "동문회가 초등학교를 인연으로 생겨난 만큼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관심을 두고 가시리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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