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3특집]120년 전 제주바다에 무슨 일이…<br>[바다를 짓밟은 기록 '도해록'](상)

[창간23특집]120년 전 제주바다에 무슨 일이…<br>[바다를 짓밟은 기록 '도해록'](상)
무차별 포획으로 어장 황폐화시킨 일본의 잠수기어업
  • 입력 : 2012. 04.23(월) 00:00
  •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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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일본어민은 속칭 '머구리배'라 불리는 잠수기어선을 이용해 제주 근해에서 무차별적으로 전복을 채취해 어장을 고갈시켰다. 심지어 이를 막는 제주어민들을 살해하고 약탈과 부녀자 겁탈 사건이 계속되자 조선 정부는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다. 사진은 1960년대 말 제주어민들이 이용한 잠수기어선의 모습. /사진=제주시 제공

출어제한 조치에도 근해 침범 저항하는 어민 살해·부녀자 겁탈 사건 잇따라
피해 가족 호소에 韓日조사단 파견·제주 유학자 김희정 동행 조사과정 기록

120여 년 전 제주에서 발생한 한·일 어민 충돌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고종 임금이 파견한 한·일 정부 조사단의 제주 항해기와 조사 과정을 기록한 고문서의 존재가 드러났다. 한말 제주 유림의 대표적 인물인 조천 출신 김희정(1844~1925)이 작성한 '도해록(蹈海錄)'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그의 4대손인 김기홍씨가 보관하던 중 김익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에게 번역을 의뢰하면서 공개됐다.

#36일간의 항해·조사#

▲당시 제주 유학자 김희정이 한·일 어민 충돌사건 조사 과정을 기록한 '도해록' 표지.

도해록은 조사단 파견 경위를 서술한 서문과 한양을 떠나 제물포에서 일본 군함을 타고 제주에 도착한 뒤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기까지 36일간의 일정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본문, 최익현이 쓴 발문으로 구성돼 있다. 제주인의 시각에서 당시 문물과 한·일 관계, 제주어민의 피해상황과 조선 정부의 대응과정 등을 서술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이 작성한 발문이 원문과 함께 전해져 사료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최익현은 발문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언급하면서 무기력한 조정을 비판하고, 조사 과정에서 김희정이 보여준 기개를 높이 평가한 뒤 모든 군자들은 김희정이 목격한 것을 들어 준거로 삼으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당시 조사단과 제주인의 충돌을 우려해 제주 출신 중에서 주민들이 신임할 만한 인물로 서울에 머물던 참봉(종9품) 김희정을 선발해 동행하게 했다.

#잠수기선 제주 출몰#

국운이 기울던 1876년(고종 13년). 조선은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부산과 인천, 원산 항구를 개항하게 된다. 이어 1883년 6월에는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에 따라 일본인들이 조선의 통어권을 획득하면서 조선 근해에서 많은 어로행위가 이뤄진다.

이때 제주도는 어민 대부분이 어업에 의존한데다 해녀들이 전복 채취를 전업으로 삼고 있어서 일본어선의 출어를 제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본의 잠수기어선은 이 같은 조치를 무시하고 제주바다에 나타나 몰래 어업행위를 한 것은 물론 이를 막는 제주 어민을 살해하고 해안가 마을을 상대로 약탈도 불사했다.

잠수기어업은 속칭 '머구리배'로 불리는 잠수기어선을 이용해 압축공기를 만들어 고무호스로 잠수부에게 산소를 전달해 조업하는 방식을 말한다. 잠수부는 수심 20m 이상 바닷속에서도 3시간 이상 자유롭게 움직이며 전복과 소라 등을 채취해 어장을 황폐화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로 넘어와서야 잠수기선이 보급됐으며, 제주도는 수산자원 고갈 및 해녀들과의 분쟁을 해소하려고 지난 1990년을 전후해 20여척을 매입·폐기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현재 제주해녀박물관에 마지막 어선이 전시돼 있다.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제주어민 가족이 임금에게 보낸 소장. 외무당상이 수결한 내용이 적혀 있다.

▲유족의 군역과 부역 등을 영구 면제해주는 내용의 완문. 이 완문과 소장의 전문 및 번역문이 건입동지에 실려 있다.



#제주바다 침탈#

일본 문서에 1860년대부터 제주에 출현한 것으로 기록된 일본의 잠수기어선은 남해안에서 상어 어업에 종사하다 1879년 이후 거제도 근해에서 처음으로 전복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주도 비양도에 상륙하려다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막아서자 1882년부터 형제섬과 가파도를 근거지로 삼고 조업했다.

우리나라 문서에는 비변사등록이 1884년 7월 어선 3척이 출몰한 것을 일본어선의 제주 어장 첫 침탈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어 1887년 8월에는 가파도에서 전복을 채취한 일본어선 6척이 모슬포로 들어와 닭과 돼지를 약탈하고 어민 이만송을 살해했다. 당시 전라감사와 제주목사가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정부는 일본대리공사에게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피해는 계속됐다.

1890년에는 일본 배가 배령리(협재리)에 와서 정박했다가 유사(有司) 양종신을 찔러 죽이자 제주목사 조균하가 정부에 일본공사와 담판해 살인을 저지른 일본인을 사형에 처하라고 청하기도 했다. 이듬해 5월에는 건입포에서 어업행위를 막는 임순백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한 뒤 달아나고, 김녕포에 들어가서도 이달겸을 살해한 뒤 밤을 타서 약탈행위를 일삼았다.

#어민들의 상소#

제주어민들의 피해가 잇따르면서 조균하가 두 차례에 걸쳐 임금에게 피해 사실을 보고하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고종은 무관 출신인 이규원을 제주목사로 발령했다. 이와 함께 임순백의 어머니 안씨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조정에 올린 소장이 원본으로 전해져 당시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금년 5월에 일본배가 갑자기 건입리 포구에 와서 채취를 하며 급히 털어가므로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못하게 차단하려는 즈음에 내 아들 임순백이 가혹하게도 일본사람들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억울한 바를 어떻게 앙갚음하여야 하겠습니까. '살인자는 죽이라'고 법전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통촉하신 후에 엄격히 조사하시어 빨리 법대로 처분하실 일이옵니다."

이에 조정은 "목숨을 보상하도록 조사할 날이 있을 것이니, 물러가 처분을 기다리라"는 내용의 회답을 외무당상 명의로 수결(手決·자필로 글자를 직접 씀)하고, 제주목사는 완문(完文·관아에서 발급하는 증명서)을 발급해준다. 김익수 사료조사위원은 "통상 백성이 상소를 올리면 관할 관아를 통해서 회답하거나 어사가 완문을 써주지만 이처럼 외무당상 명의로 회답하고, 제주목사가 완문을 발급하는 일은 드물다"고 설명했다.

당시 임순백에게는 아들 정룡이 있었는데 조정은 신역(身役·성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군역과 부역)과 연호잡역(煙戶雜役·집집마다 부과하던 여러 가지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 준다. 그리고 안씨의 소장을 접수한 지 두 달 만에 한·일 합동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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