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1)/제2부-사라진 성, 훼손된 성곽](5)헐어버린 건물들(하)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1)/제2부-사라진 성, 훼손된 성곽](5)헐어버린 건물들(하)
성곽 허물어 측후소 설치… 제주城 역사경관 사라지다
  • 입력 : 2014. 05.21(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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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 건물이 제주성 동치성 위에 건립된 제주 측후소, 빨간선 안은 제주신사다. 1930년대 풍경으로 산지다리를 따라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 역사 발췌>

제주기상의 역사와 함게 성곽.누각 차례로 멸실
탐라문화광장 조성 맞물려 종합계획 수립해야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제주성 안에는 고풍스런 누각이 많았다. 제주성의 문루로는 동문인 연상루와 서문인 진서루, 남문인 정원루가 있었다. 제주성 문루는 1910년대까지도 남아있었다. 1900년대 초에 찍은 진서루, 정원루의 모습은 일제에 의해 헐리기 전 제주성이 여전히 견고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문에다 산지천 서쪽변을 따라 쌓은 간성 북쪽에는 중인문, 남쪽에는 소민문이 자리했다. 중인문, 소민문을 통해 사람들이 산지천을 건너 오갈 수 있도록 했다.

산지천에는 북수구와 남수구가 무지개다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아름다움을 뽐냈다. 성곽 부속건물로는 제이각(청풍대), 공신정, 결승정, 운주당, 일각 등이 요소요소에 자리했다. 영은정과 과원, 삼천서당, 한취당, 달관대, 이택, 샘, 칠성대 등이 곳곳에 있어 제주성만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누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벽마저 대부분 멸실된데다 고풍스런 누각 또한 남아있지 않아 성곽도시 제주시는 전통역사경관이 사라진 국적불명의 회색도시로 변했다.

달관대 터 임을 알리는 표석.

산지천 동쪽, 동문로터리에서 제주지방기상청 일대는 제주성 제1의 절경이자 유서깊은 역사경관지였다. 산지천을 배경으로 한 단애면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고 곳곳에 공신정과 결승정, 삼천서당 등이 자리했다. 절벽 아래로는 사시사철 샘이 솟아나 제주성안의 사람들에게 생명수 역할을 했다. 산지천 하류 무지개다리인 북수구 아래로는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1735년 제주에 부임한 '노봉' 김정(1670~1737)은 공신정 아래의 기암절벽을 두고 각각 '용린병' '중장병' '호반병'이라 이름 지었다. 그 아래서 솟아나는 샘물은 '감액천' '급고천'이라 했다. 그가 남긴 『노봉집』에는 이와 관련된 대목이 나온다.

"사라봉은 한라산에서 오다가 바다에 이르러 서쪽으로 휘돌며 제주성의 동북 모서리로 들어와 우뚝하게 절벽이 솟았다가 작게 다시 세 가닥으로 나뉘었는데, 가운데는 중장병, 왼쪽은 용린병, 오른쪽은 호반병이다" 하였다.

노봉의 찬탄해마지 않던 경관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본격적으로는 제주기상청의 전신인 제주측후소가 건립되면서부터다.

제주 기상의 역사는 1923년부터 시작된다. 그 해 제주측후소가 건립돼 기상관측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제주측후소가 자리한 곳은 제주성 동치성 성벽 위였다. 그것은 곧 제주성 동성 성벽과 이 일대 누각이 철거되기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제가 동치성을 허물고 측후소를 세우면서 이 일대 경관은 망가지고 누각은 차례로 헐리기 시작하는 운명에 처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신정과 함께 결승정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 초중반 제작된 '제주목도성지도'를 보면 동치성 일대에는 결승정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결승정은 원래는 해산대로 불렸다. 이경록 목사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제주도를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하여 제주성내의 동북쪽에 위치한 해산대에 전승을 다짐하고 무운을 비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결승정 역시 사라지고 폐허만이 남았다.

공신정 터에 들어선 제주신사. 도리이와 본 건물 사이에 공신정 주춧돌이 일부 가공돼 받침대로 이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시대 자료수집 보고서 발췌>

달관대의 경관도 사라졌다. 달관대는 제주기상청 주변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높이 솟아오른 바위와 나무숲의 울창함이 사계절의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김정 목사가 1736년(영조 12) 달관(達觀)이라 이름 붙였다. 김정 목사는 달관대에 대해 "북쪽으로는 넓고 아득한 바다를 누르며, 남으로는 영주(瀛洲)를 감돌고, 서로는 지는 해를 떠나보내며 옛 도읍을 굽어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달관대 인근에는 삼천서당이 있었다. 삼천서당은 1736년 김정 목사가 후학양성을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다. 제주성안에 자리잡은 교육기관으로 제주만의 독특성을 보여주지만 일제 강점기에 헐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던 무지개다리인 남ㆍ북수구는 1927년 7~8월 큰 비로 무너져 내렸다. 북수구와 남수구는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에 의해 창건됐다. 이후 홍수 등에 의해 수차례 무너지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까지 존치하면서 제주성안의 대표적인 명승이 됐다.

이처럼 제주기상청과 산지천변을 중심으로 제주성의 주요 누각과 경승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제주성 최고의 역사문화경관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오늘날은 헐리다 만 성담만이 옛 영화를 느끼게 할뿐이다.

주목되는 것은 제주도가 산지천 일대 4만5845㎡ 부지에 2015년까지 사업비 515억원을 들여 탐라문화광장을 조성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산지천과 연계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관광객과 도민의 교류와 만남의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탐라문화광장은 중인문과 북수구, 산지천 변을 따라 쌓았던 간성이 위치했던 곳이 사업 대상지에 해당한다. 이런 연유로 북수구와 중인문에 대한 복원정비는 물론 공신정과 결승정, 달관대 등을 포함하는 원도심 활성화 대책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은 "탐라문화광장 조성과 맞물려 중인문 삼천서당 결승정 공신정 등으로 이뤄진 제주기상청 일대 단애지역의 전통문화경관을 복원하기 위한 종합적인 정비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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