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 남문에서 이어진 한짓골. 제주성안의 중심도로였으나 지금은 퇴색된 거리로 변했다. 강희만기자
사통팔달 도로가 뚫리고 간선도로 수없이 생겨났지만옛길은 여전히 회색빛 도시를 살아 숨쉬게 하는 실핏줄 역할
원도심 일대 옛길 40여곳 남아…분포·잔존실태 등 파악 안돼
보존·활용대책 등도 무관심…옛길 포함 제주성 복원 고민해야
유서 깊은 도시는 과거의 역사와 삶의 흔적을 품고 있다. 탐라시대 이래 제주의 중심이었던 제주성 안 원도심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4차선, 6차선 도로가 성안을 관통하고 간선도로가 수없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옛길은 실핏줄처럼 도심을 연결하면서 살아있다. 도시가 팽창 할수록 오래된 길에서 느끼는 도시와 사람의 역사, 삶의 체취는 그 깊이를 더한다.
그렇지만 하루가 멀다하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뚫리는 마당에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은 설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제주성과 제주시 원도심이 그렇다. 도로를 넓히고 건물을 철거해서 더 크고 높게 짓는데만 관심을 둘뿐 옛길의 중요성을 주목하지 않는다.
제주성과 원도심은 천년을 이어온 역사도시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성곽 대부분이 멸실되고 누각도 헐리기 시작했다. 복원된 제주목관아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골목길 등지 외에는 고풍스러운 느낌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천년을 이어온 역사도시라고 하기에는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제주성과 원도심의 옛길은 단순히 과거의 길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의 연결고리가 된다. 현재의 길이자 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제주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무미건조한 회색빛 도시가 그래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옛길 등이 여전히 도심 구석구석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제주성 원도심의 도로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제주성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가 거의 일직선 대로로 뚫리고 옛길도 번듯하게 포장돼 신작로로 둔갑하기도 한다. 일제의 신작로 개설 등으로 도로체계의 변화가 일어나고 광복 이후에도 소멸된 경우가 많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옛길이 곳곳에 남아있다.
좁고 구불구불 이어진 옛길은 현대화란 이름으로 너비가 확장되거나 선형이 변경되면서 단절에 이른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사통팔달 큰 길이 뚫리면서 흡수되거나 도시개발의 거추장스런 존재로 인식돼 소멸되어버리기도 한다. 혹은 오래된 미래에서부터 이어진 길이 도시민과 관광객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새롭게 재탄생되기도 한다.
제주성 주변과 원도심 안에 남아있는 옛길은 얼마나 될까. 취재결과 40여 곳 정도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옛길은 도심의 뒷골목으로 인식되기 십상이지만 엄연히 현대화된 도시의 일부분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옛길은 여전히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고, 옛길을 통해 넓고 화려한 큰 길과 만난다.
최근 들어 차츰 옛길의 가치에 주목하고는 있지만 옛길의 분포와 잔존실태 등에 대한 파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시재생이나 재개발계획은 있어도 옛길 보전이나 활용대책 등에는 무관심하다.
옛길을 감안하지 않은 무분별한 도시개발과 도로개설은 성곽도시이자 역사도시인 제주시 원도심을 더욱 더 국적불명의 도시로 만들고 있다. 제주성 정비 복원이 단순히 성곽과 누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옛길을 포함한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이뤄져야 하는 이유이다.
[전문가기고/김태일 제주대학교건축학부 교수]원도심의 옛 골목길, 그 가치와 의미
서양이든 동양이든 사람중심의 전통적인 도시공간구조의 틀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자동차 중심의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 원도심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 원도심 공간구성은 동문과 서문, 남문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서민들의 생활공간의 조직에 따라 작은 골목길들이 실핏줄처럼 형성되었을 것이다. 잘 짜여진 서양도시의 길과 달리 구부러지고 휘어진 길이지만 큰 길과 작은 길의 기능적 위계 질서 속에서 일상적인 삶의 공간이 조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 관덕정을 지나는 길들 역시 자동차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넓혀지고 제주목 관아 건축물을 철거하여 일제강점기의 행정업무를 위한 근대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주읍성을 허물어 성돌을 제주항 방파제 축조를 위해 사용했고 철거된 성터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들이 개설되면서 크고 작은 골목길이 만들어냈던 다양한 길의 풍경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더욱 가속화됐다.
현재 원도심 공간은 오랜 세월의 흐름을 잘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도심 공간을 가장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골목길이다. 1914년 일제강점기때 제작된 지적도를 근거로 하여 제주성의 옛 골목길과 현재의 도로체계 위에 겹쳐본 결과 도로개설로 인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옛 골목길의 흔적들이 남아있어 이에 대한 보전정책이 필요하다고 할수 있다.
원도심 옛 골목길은 폭 1.1m 정도로 겨우 한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협소한 공간이지만 여기에는 인간적인 따스함이 넘치는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옛 골목길을 주목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길과 관련된 공간적 정보, 역사적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운주당길, 이앗골, 객사골, 옥길, 향교길 등은 골목길에 관청시설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동불막골, 서불막골 등은 방화기능을 가진 길의 기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같이 원도심내 옛 골목길은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공간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귀중한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좁고 불편하고 주차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근대건축물과 함께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원도심의 풍경이 크게 훼손되어 가는 실정이다. 명품도시, 문화도시의 전제조건은 오래된 것, 낡은 것, 때묻은 것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통 및 근대건축물과 옛길의 풍경과 어울리는 현대적인 건축물이 공존하는 것이다.
화려했던 제주 원도심의 역사를 보여주듯 원도심내에는 여전히 50년,60년 세월의 때가 묻은 건축물과 옛 골목길이 파편적으로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재생이 고립적으로 남아있는 전통 및 근대건축물과 옛 골목길들을 잘 보전하고 복원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