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대정읍 송악산을 배경으로 한 알뜨르비행장에 늘어서 있는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이용됐던 격납고들. 이승철기자
세계유산·지질공원 등 아름다운 수식어 뒤엔 상처투성이 아픈 역사
올해 광복 70주년 불구 제주도 무관심 속 방치 관련 사업도 전혀 없어
세계유산 등재 추진하는 중국·서울시 등 사례 적극 검토해 본받아야
제주는 세계유산의 섬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과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전지역 등으로 지정된 것은 제주의 가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제주의 수려한 자연경관은 이미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다. 화려한 수식어에 감춰진 제주의 속살은 상처투성이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제주에 남겨진 전쟁의 상처는 그 어느 곳보다 커다란 생채기로 남아있다. 일제가 패망한지 올해로 70년이 됐지만 상처는 오히려 덧나는 분위기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반성하기는커녕 더욱 노골적으로 역사도발과 왜곡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올해 광복 70주년이 주는 의미가 엄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사포 진지. 이승철기자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한반도를 시작으로 중국대륙과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다. 식민지배의 아픔과 전쟁의 소용돌이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러 나라를 집어삼켰다. 일제는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12월 미국령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온갖 수탈이 자행됐다. 20세기 가장 부끄러운 전쟁범죄 가운데 하나인 위안부 강제동원 등 반문명적인 행위가 이 당시 저질러졌다.
제주도는 일제침략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쟁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심 무대 가운데 하나다.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에는 일본군 7만5000여명이 진주했다. 만주에서, 일본에서, 한반도에서 중무장한 병력이 머나먼 제주도로 집결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는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해지자 제주도 곳곳에 군사시설을 구축한다. 일본 본토사수를 위한 결전의 장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것이다. 이른바 결7호작전이 제주도에서 준비됐다. 미군과의 일전에 대비해서 제주도 곳곳은 전쟁기지로 변했다.
군사비행장만 해도 알뜨르비행장을 비롯 교래리 비밀비행장 등 4곳이 만들어지거나 계획됐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성산일출봉, 세계지질공원인 수월봉을 비롯한 해안가는 자살특공기지가 숨을 죽이고 있다. 100곳이 넘는 오름 지하는 지하갱도로 벌집처럼 뚫렸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제주도의 산하가 일제의 전쟁야욕으로 파헤쳐진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강제 동원돼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다. 그로 인한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제주도 서남부인 대정읍 알뜨르평원을 가보자. 이 곳에는 콘크리트 격납고 20기와 고사포진지 4곳, 지하벙커와 통신시설, 비행장 활주로 등이 자리하고 있다. 길이가 1㎞가 넘는 거대 지하호도 미로처럼 뻗어 있다.
알뜨르비행장은 처음 중국대륙 폭격을 위한 도항기지로 1930년대 초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후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일제의 전쟁기지로 이용됐다.
격납고. 이승철기자
실제로 이 곳에서는 중국대륙 폭격이 이뤄졌다. 1937년 8월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항공기지에서 난징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해양폭격에 나선 전투기의 귀착지는 알뜨르비행장이었다. 이후 제주도로부터 난징공습은 36회, 연 600기에 달했다. 투하폭탄 총계는 300톤에 이를 정도다. 알뜨르비행장에서의 공습으로 상해와 난징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처럼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에 남겨진 군사시설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주도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 미국, 중국과 관련된 전쟁유산인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상대로 일으킨 세계대전과 관련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일본이 노골적인 역사왜곡과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현실에서 제주도 전쟁유산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제주도의 전쟁유산에 대한 관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지만 관련 사업은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다른 지자체와 중국 등에서 일제 강점기 유산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실정이다.
서울시는 2013년부터 용산기지내에 있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들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고 있다. 일제 군사시설이 부정적인 역사지만 역사교훈현장으로서 중요성을 감안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하고 순차적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학술적 가치 규명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섯알오름 동굴진지.
중국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일제 관동군 731부대 터를 세계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2012년부터 등재후보에 올려놓고 추진하고 있다. 세균전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 터를 세계유산에 등재함으로써 일제의 반인류범죄를 영구히 기록하기 위한 차원이다.
반면에 일본은 한인들을 강제동원하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전쟁시설들을 세계유산에 등재를 추진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등의 반발을 사고 있다.
국내외의 사례는 제주도의 전쟁유산에 대해서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제주도 역시 태평양전쟁 시기의 유산에 대해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일제 잔재나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과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는 역사교훈현장으로서의 중요성을 감안해야 한다. 20세기를 뒤흔든 세계대전과 관련된 전쟁유산으로 미래지향적인 시각에서 접근해 나가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제주의 가치는 아픈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때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