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한라칼럼] 악의 축

[허수경의 한라칼럼] 악의 축
  • 입력 : 2017. 12.26(화)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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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시집와 아이가 중학생이 된 지인이 이사를 했다. 십년 넘게 살았던 동네를 떠난다기에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삼자대면' 스토리를 다 들은 다음에는 어서 이사 날짜가 되기를 나도 함께 손꼽았다.

한 동네에 오래 살면서 유독 친해지는 이웃이 있다. 서로의 집을 오가고 과거사를 털어놓고 목전에 놓인 어려움을 돕다보면 어느새 가족처럼 의지하게 된다. 그렇게 다져진 각별한 친밀감은 곧잘 실수를 낳는다. 지인도 그랬다. 편한 마음에 믿고 털어놓았던 속마음들이 전혀 다른 모양새로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그녀를 제외한 단톡방에서 점점 부풀려졌다. 결국 그녀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장소에 나가 삼자대면을 해야 했다. 자신이 발가벗겨지기를 고대하는 '잘 아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그녀는 똑똑한 정신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컷 '조리돌림'을 당하고 한동안 집 밖에 나갈 수도 없었던 그녀는 공황장애로 치료를 받았다. 낯선 동네로 옮겨진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

방송 활동을 하며 악성 댓글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 내공이 쌓인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한 기사의 먹이가 되는 것이 여전히 힘들고 두렵다. 가급적 자극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높으며 나빴던 일을 상기시키는 제목일수록 클릭 수는 높아진다. 여지없이 무서운 댓글들이 등장한다. 저급하고 무자비한 글들은 온 몸에 오물을 뒤집어쓴 채 영혼을 두드려 맞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방송을 그만두면 겪지 않을 텐데….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다. 이사하는 것으로 고통의 현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느낀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유명인과 불특정 다수가 아닌 친밀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온라인 조리돌림과 사이버 불링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가혹하다. 오래전, 스페인 여행에서 목격했던 투우경기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방금 전 까지 펄펄 살아있던 소가 순식간에 등에 잔뜩 화살을 꽂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질질 끌려나가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눈만 끔벅이고 있던 소에게 붉은 천을 펄럭여 싸울 마음을 일으키고 소가 반응하면 투우사는 여지없이 등에 화살을 내리꽂았다. 관객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죽어 마땅한 대상'에 대한 처단을 목도하는 집단의 쾌감은 생명체 혹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프랑스의 단두대 앞에서도 구경꾼들은 분명 비슷한 종류의 환호성을 질렀으리라! 처단의 대상에 대하여 맹렬히 집결하는 팬덤('광신도들의 영지'라는 의미의 합성어)은 속칭 '빠(헌신)'와 '까(혐오)' 간의 온라인 혈투를 양산하고 있다.

헌신하는 편에서는 자신의 대상을 혐오하는 자들이 '정의'가 아니다. 혐오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대상을 발가벗기는 것이 어리석은 헌신을 종결시키는 '정의'이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불사한다. '옳다'는 정의감은 상대를 죽어 마땅하게 하기 때문이다. 잔혹한 처단의 쾌감을 느끼는 집단 행위는 학교, 직장, 크고 작은 모임들,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한 동네에서도 실행 중이다. SNS 투우경기장에서는 소가 아니라 인격이 바닥에 쓰러져 질질 끌려나가고 있다.

2017년 한 해 동안 몇 개의 화살을 누구의 등에 꽂았는가. 이제 또 누구 차례인가. 새 해에는 부디 그 독화살을 꺾어 더 이상의 살인행위를 저지르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허수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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