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너무도 평범했던 간첩이 된 아버지들

[책세상] 너무도 평범했던 간첩이 된 아버지들
간첩단 사건 기록 김호정의 '발부리 아래의 돌'
  • 입력 : 2018. 01.19(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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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
10년 규명 끝에 무죄 판결 받아
"희생된 사람들은 평범한 이웃"

엄마와 아빠, 4남매가 사는 길모퉁이 세 번째 파란 대문집이 있었다. 이 집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봄이면 꽃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마루에 걸터 앉아 별들을 바라보고 가을엔 아빠가 매달아준 그네를 타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특별할 것 없었지만 행복했던 일상은 어느 해 2월 아빠가 낯선 사람들이 타고 온 검은 차에 태워져 집을 떠나면서 균열이 생겼다. 아이들은 매일 저녁 아빠를 위해 기도했지만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의 소식이 전해진 때는 그로부터 2년 뒤였다. 늦은 봄, 아빠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엄마는 한달음에 교도소로 달려갔다. 아빠는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아빠는 숨을 거둔다.

딸이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다. '간첩단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엄마에게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 쓰러져 돌아갔다고 했다.

김호정의 '발부리 아래의 돌'은 그 사연을 담고 있다. 지은이는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김추백씨의 딸로 간첩단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기록했다.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 사건은 1977년 벌어졌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던 재일교포 강우규씨 등 11명이 연루됐다. 남산으로 연행된 그들은 갖은 고문과 협박으로 간첩이 되어갔다. 간첩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저자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와 일본을 오가며 일일이 피해자들을 만나고 만 장이 넘는 관련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10년의 긴 싸움 끝에 진실 규명 결정과 무죄 판결을 받아낸다. '무죄'라는 그 한마디를 너무도 갈망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고 마음은 한없이 허망했다.

그는 이 책을 엮으면서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을 겪은 아버지들이 대한민국 아픈 근현대사 속 피해자 일반이 아니길 바랐다. 길모퉁이 푸른 대문 집에서 어린 딸의 머리를 땋아주고 꽃씨를 함께 거두던 우리 곁의 한 이웃으로 기억되길 소망했다.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범죄자나 학살자들의 몫만이 아니다. 희생된 이들을 내 이웃으로 기억하고, 과거의 고통에 맞닿아 있는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는 것. 그런 평범한 책임감들이 다른 미래를 가능케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 기록은 발부리 아래 돌 같은 거다. 길을 가다 걸림돌 때문에 발을 헛디뎠다면 잠시 멈추고 그들의 삶을 생각해보시라는. 우리학교.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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