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압록강·두만강을 가다] (8)세계유산 고구려 유적들

[백두산·압록강·두만강을 가다] (8)세계유산 고구려 유적들
고구려 황금시기 웅변… 관심없인 과거 흔적에 그칠 우려
  • 입력 : 2018. 10.16(화) 20:00
  • 이윤형 선임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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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야산처럼 보일 정도로 훼손된 광개토대왕릉특별취재팀

2004년 북한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중국정부 관련 유적 지속적인 정비

동북공정 프로젝트 분위기 '실감'
광개토대왕비 중화민족 비석예술로

압록강을 마주하고 있는 길림성 집안이나 요녕성 환인 일대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중심이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도읍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진 오녀산성(졸본성)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 국내성 등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구려의 황금시기를 이룬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중국 내에 있는 이들 유적은 지난 2004년 7월 '고구려의 수도와 왕릉, 그리고 귀족의 무덤'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 유적과 함께 등재되면서 관심을 모았다.

환인시에서 바라본 오녀산성 전경

오녀산성 입구의 성벽

성 안에 있는 연못인 '천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유적은 이후 중국 당국에 의해 대대적으로 정비가 이뤄지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와 광개토대왕릉, 장군총(장수왕릉) 등은 말끔히 단장한 모습이다. 오녀산성 등은 발굴과 함께 정비가 추진되고 있다.

'해동 제일의 고비'라 불리는 광개토대왕비는 기원 414년에 세워졌다. 세계문화유산 마크가 선명한 안내문을 지나면 바깥을 유리로 두른 광개토대왕비가 나타난다. 관람객들은 밖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은 이 비에서 남서방향으로 36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동서남북의 길이가 62~68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처음 조성 당시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덤 높이는 14m로 묘실이 있는 곳까지는 계단을 오르도록 돼 있다. 무덤 주위는 둘러볼 수 있도록 산책로를 내고 비슬나무 등을 심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

집안시에 위치한 국내성.

하지만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의 영화를 느끼기에 앞서 씁쓸함이 밀려든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왕릉은 돌무지가 이리저리 헤집어지고, 석재들이 나뒹구는 등 훼손된 모습이다. 잡초만이 무성하여 멀리서 보면 그저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또 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였던 국내성(서기 3~427년)은 고층 건물에 둘러싸인데다, 아스팔트 도로를 개설하면서 성벽을 관통한 형국이다. 도심속에 위치해 있어서 훼손위협에 노출돼 있다.

장군총을 비롯한 고구려 유적들은 중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 중국 국가고고학유적공원 및 중국저탄소시범관광지로 지정돼 있다. 중국은 고구려 문화재 유적 관광지라는 이름 아래 적극적으로 관광자원화에 나서고 있다. 이는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에서도 느낄 수 있다. 장군총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수백 년 세월을 견뎌 지금까지도 거의 온전히 남아있는 모습에 고구려 석조예술과 축조기술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이 2002년부터 시도하고 있는 동북 3성 내에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 등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분위기도 실감할 수 있다.

장군총 입구에 세계문화유산 로고를 새긴 채 세워진 '고구려 문화재 유적 관광지' 안내문을 보자. 안내문에는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여기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온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으로 불리는 '해동제일의 고대 비석'이 있고,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도 있다"라고 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등을 중화민족 비석 예술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한국 관광객은 주시의 대상이다. 고구려 유적지를 방문할 때 플래카드나 깃발은 금지된다. 한국과 관련된 문구는 물론 이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 등을 찍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답사에 나선 탐사단도 깃발 등을 수색 당해 방문이 끝나고 나설 때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집안 일대에 남아있는 고구려 관련 고분은 1만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비롯 수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있지만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 학계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면 고구려 역사와 유적은 단지 중국내에 있는 과거의 흔적으로만 남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특별취재팀

멀리서 보면 야산처럼 보일 정도로 훼손된 광개토대왕릉(사진 위)과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사진 아래 왼쪽). 집안시에 위치한 국내성. 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 동아시아 제국 이룬 유적들 즐비

고재원 제주문화유산연구원장

최근 추석을 맞아 영화 '안시성'이 개봉됐다. 고구려가 요동벌판에서 당 태종 이세민의 20만 군사와 맞서 싸워 승리한 전쟁영화다. 삼국시대 고구려 영토는 중국의 동북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영토로 동아시아 제국이었다.

고구려는 알려져 있다시피 졸본에서 시작하여 압록강변 수도 집안에 거점을 두어 중국, 일본, 신라, 백제와 700여년간 끓임 없는 전쟁과 외교전략을 통해 동북아시아 강자로 군림한다. 집안에는 국내성터를 비롯해 광개토대왕(호태왕)비, 광개토왕릉, 장군총, 오회묘 등 고구려 벽화고분이 즐비하게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 규모는 높이 6.3m, 너비 1.3~2m, 무게 37t가량 된다. 4면에 한자 1590여자가 음각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국가의 건국신화를 기록하고 나아가 선대왕에 대한 기록이 서론 부분에 해당되는 기록이다. 본론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즉위 후 정복활동과 성과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란족 일파 정벌, 백제와의 일전(396년)을 통해 한강이북 58성 700촌 정벌, 동만주 지배권 강화, 신라의 원군 요청으로 5만 군사 파견으로 일본 격파(400년), 동부여 공략으로 지배권 확대 등 업적을 연대기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말미에는 고구려 역대 왕들의 능을 수호하기 위해 수묘제를 개혁하는 내용이다.

이 비문은 조선시대에는 금나라 황제의 비로 잘못 알려져 있었고, 19세기 후반에 들어 금석학자인 중국인(關月山)에 의해 비로소 광개토왕비임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한 비문탁본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비문내용 중 신묘년 기사에서 왜가 백제, 가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여 일본의 대륙진출을 하는 명분으로 삼기도 한다.

유리문으로 보호시설을 한 광개토대왕비.

하지만 해방후 북한 사학자(박시형)와 재일동포 사학자(김석형, 이진희)들에 의해 일본 관학자들의 사료조작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저서들이 출간된다. 1980년대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비문의 단순한 해석에서 벗어나 당시 동북아 정세, 구조분석, 사회사적 접근 등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하여간 이 비문은 동아시아에서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으며, 나아가 주변국 사이에서 우월적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석과 가까운 곳에 거대한 광개토왕릉이 있는데, 꼭대기에 시신을 안치한 집모양의 돌방이 있다. 이곳에서 멀리 압록강을 비롯한 집안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주변으로 둘러싼 산들로 인해 과거 고구려 최고의 천연 요새임을 그려 볼 수 있다.

장군촌은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다. 다듬은 장방형의 화강암석재를 이용해 7단의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무덤의 규모는 밑변길이 31.5m, 높이 13.1m로 무덤의 상부는 50톤 무게의 덮개돌(蓋石)이 있다. 무덤의 하부 변두리에는 10톤 무게의 지지석(護石)이 11개가 둘러져 있다. 무덤 정상부에는 20여개의 기둥구멍이 남아 있고, 기와편이 확인되는데, 아마도 기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의 남서쪽에 떨어져 제단유적도 남아 있기도 하다.

광개토왕 태왕릉은 밑변 길이가 62~68m, 높이 14m로 8단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규모가 장군총보다 훨씬 크다. 현장에서 보면 곳곳이 무너져 있어 세월이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벽돌에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태왕릉이 산악처럼 견고하고 영원하길 원한다'는 내용이 안내문에 적혀 있다.

국내성은 집안 분지 가운데에 있는 방형의 평지성이다. 유리왕이 졸본에서 집안으로 천도하고 쌓은 왕성이다. 성은 둘레가 2686m로 제주성 규모와 비슷하다. 1975년 발굴조사 당시 기저부 아래층에서 토루(토성)가 확인되었는데,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사군 설치 전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기존 토성위에 석축을 쌓아 국내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2차 성벽도 확인되는데 고국원왕때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들어 집안시가 확장되면서 파손이 많이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도읍을 세 번 옮겼는데, 졸본-국내성-평양성- 장안성이다. 졸본은 지금의 환인, 국내성은 압록강변의 집안, 장안성은 평양성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곳곳에 산성을 쌓았다. 그중 졸본(환인)에 있는 오녀(五女)산성은 단연 독보적이다. 밑에서 마이크로버스로 30여분을 달리고, 급경사면을 이루는 1000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정상이다. 오르고 나니 탈진상태다. 환인시 평지에서 보면 하부의 숲과 상부에 깎아지른 아찔한 수직절벽이 보일 뿐이다. 정상부가 산성이다. 진입로도 절벽 틈새로 좁다. 전형적인 테뫼식산성인 오녀산성은 천연성벽으로 완만한 경사면 혹은 진입로 주변에만 성을 쌓았다. 정상부에 올라서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졸본평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만약 적의 군대가 오면 바로 식별 할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어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가운데에 '천지'라는 연못과 우물이 남아 있다. 하늘에 떠있는 천상의 요새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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