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제주문화를 일군 역사인물 김정들(Ⅱ)

[문영택의 한라칼럼] 제주문화를 일군 역사인물 김정들(Ⅱ)
  • 입력 : 2020. 03.24(화)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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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주의 역사문화를 일군 김정들을 만난다. 서귀포시에'김정문화회관'을 기증한 김정 여사, 노봉 김정 목사 그리고 충암 김정 선생이 그 분들이다.

산지천과 동성(東城) 사이에 있었던 삼천서당은, 제주에서 운명한 노봉 김정 목사가 1735년 세운 학교이다. 경북 봉화군 출신인 김정 목사는 '무리가 있으면 학교가 있어야 하고 집이 있으면 글방이 있어야 하는데, 천년 사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제 이루게 되었으니, (중략) (선비들이) 아름다운 풍습을 드러내고 옛 풍습을 계승해 영세토록 새롭게 해 주소서.'라는 삼천서당 상량문을 남겼다. 그는 또 '노봉집'에 충암 김정을 흠모하는 다음의 기록도 남겼다. '가락천 근처 돌이 널려 있는 사이에 생긴 말(斗)통 모양의 작은 우물은, 충암 김선생께서 귀양살이 할 때 판 것으로 판서정(判書井)이라 부른다. 혹 백세 후에 찾지 못할까 해 우물가 돌에 새겨 표시했다.'

충암 김정은 22세에 대과에 장원급제, 35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조광조와 함께 미신타파와 향약의 전국적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간신들의 모함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된 충암은 1521년 사사될 때까지 1년 2개월 간 제주유생들을 훈학하며 '제주풍토록'을 기록했다. 제주풍토록은 16세기의 제주를 담은 제주 최초의 풍토지이자 훌륭한 수필로도 평가받는다. 다음은 제주풍토록에 실린 유배지에 관한 기록이다. '내가 사는 곳은 동문 밖 한 마장쯤 거리에 있는 금강사 옛 절 자리에 있다. (중략) 안에는 작은 온돌방 하나가, 밖에는 대청마루가 있어 볕도 쪼일 수 있고, 달도 구경할 수 있다. 대청 처마 아래에는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1545년 사면된 충암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는다. 1578년 제주판관 조인후는 충암 김정의 넋을 달래고자 산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廟)를 세웠다. 1658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괴는 제주선비 명도암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집터에 장수당(藏修堂)이란 학사를 짓고 훈학활동을 펼쳤다. 1665년 최진남 판관은 가락천에 있던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니, 드디어 사당(祠)과 교실(齋)을 갖춘 귤림서원이 세워지고, 1682(숙종 8년) 사액이 내려와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을 모시다, 1696년 송시열 등 5현을 배향하게 된다. 귤림서원이 들어선 오현단에는 충암 유허비도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1852년 제주목사 백희수가 충암의 적거터에 세우게 했던 것을 해방 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우리는 세상살이 이치와 삶의 여러 모양을 문화라 한다. 필자는 평소 문화를 언문(言文)과 교화(敎化)의 준말로 여기고 있는바, 간신들의 말과 글로 제주에 유배와 사사된 충암 김정 시대의 선비문화가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문화는 곧 말과 글을 어떻게 가꾸고 다듬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느냐에 달려있을 게다. 결국 개인과 집단이 쓰는 말과 글이 곧 우리 문화의 가늠자인 셈이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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