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동·비양동 자연마을 500명 거주제주최초 우도등대는 해양관광상품검멀레해변·달그리안 등 명소 가득마을공동체 붕괴 걱정 속 본질찾기
제주의 동쪽 끝 조일리. 그래서 조일리의 아침은 다른 곳보다 한 발 앞서 온다. 우도 비양도 너머 바다를 박차고 오른 아침햇살이 흔들거리는 물결에 비추며 반짝거린다. 부지런한 바닷사람들을 일찍 흔들어 깨우는 빛이다.
조일리(朝日里)는 우도면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햇살이 가장 먼저 비추는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약 100년 전 목장을 개간하기 위해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남쪽의 영일동과 북쪽의 비양동 두 개의 자연마을에 500여명이 주민이 살고 있다.
검멀레해수욕장의 오후
우도의 비양도는 과거 다리가 없던 시절 물이 빠지면 헤엄을 쳐서 건너다니던 곳이다. 이후 다리를 쌓아 지금은 물때와 상관없이 들고나기 편하게 돼있다. 비양동의 넓은 테역밭에 바다를 향해 쌓아 만든 비양망루가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딱 좋은 곳이다. 푸른 초원을 이룬 테역밭은 캠핑장이 된 듯 텐트들이 쳐져있다. 날이 좋은 날 이 곳에서 일출, 일몰을 보기 더없이 좋은 곳이다.
조일리와 천진리를 사이에 두고 우도봉이 자리한다. 우도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해서 '쇠머리오름' 혹은 '섬머리'라고도 한다. 높이 132.5m로 우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이 곳에 오르면 우도는 물론 제주본섬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 한라산과 다랑쉬, 지미봉 등의 오름은 물론 성산일출봉의 아름다운 자태까지 또렷이 보인다. 이처럼 해안으로 내리지르고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정말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곳은 파도와 바람에 여전히 깎여 내리고 있다. 먼 훗날 언젠가는 지금의 모습은 변하고 없을지 모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언덕은 그 아찔함만큼 절경을 선사하는지도 모른다.
우도민들의 생활을 담은 전시장
우도 본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풍경
우도봉에는 우도 등대가 있다. 1906년 3월 세워진 제주 최초의 무인등대다. 이후 2003년 새로운 등대 탑을 신축해 IT기술과 접목시켜 현재에 이른다. 또한, 과거의 등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등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원형을 보존한 채 있다. 지금은 주변에 등대공원을 조성해 해양관광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도봉 아래로 검멀레 해변이 있다. 검은 모래 해변이라는 뜻으로 우도의 생성과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도봉의 단면이 훤히 보이는 협곡에서 비스듬한 돌들의 켜를 보게 된다. 바다에서 솟아난 화산이 돌이 돼 대지를 이루고 산을 만들다 부서져 모래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고서 만들어졌을까? 고래 콧구멍이라 불리는 해안의 동굴들은 여전히 바다와의 사투로 깎이며 뚫리고 있다. 천장에서 뚝뚝 끊겨나간 돌들이 종잇장처럼 널브러지고 파도는 또 다시 이에 부딪치며 부드럽게 다듬어낸다. 이런 자연의 조화들이 경치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우도팔경 중 제1경인 주간명월(달그리안)이다. 해식동굴에 햇빛이 반사돼 동굴의 천장에 달 형상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이르는 말이다. 그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오전 10~11시 경 배를 타고 나가야 잘 볼 수 있다.
제주 최초의 무인등대였던 우도 등대
고래 콧구멍이라 불리는 동안경굴
우도봉에 오르면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등이 훤히 보인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우도인지라 최근 이 곳은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다. 과거 우마차와 리어카가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온갖 탈것들이 해안도로를 점령한다. 관광객이 넘쳐나는 즐거운 비명 속에 마을의 공동체가 파괴됨을 걱정하게 된다. 개발의 양면 속에 본질을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성찰의 시간들이 필요한 때다. 자칫 '우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들이 진행중이다. 김석린진사역사공원 개관기념 전시인 '섬에서 태어나 바람이 되다' 전은 그 첫 발자국이다. 잊혀진 과거의 풍경들 속에서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런 자발적 기획들로 인해 우도의 참 속살과 본질이 되살아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인터뷰]
“글 소통으로 공동체 회복 엿보게 돼”김영진(우도마을신문 달그리안 대표)
달그리안은 우도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마을신문이다. 2017년 첫 신문을 발행한 이후 계절마다 우도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신문이 됐다. 급격한 변화로 많은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 지켜야할 소중한 것들이 있다. 이를 담아내는 작업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신문을 만들게 됐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치유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글을 통해 소통을 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회복도 엿봤다.
최근 김석린진사생가터를 새롭게 조성하며 '우도섬마을생활사박물관'이 생겼다. 그 첫 발걸음으로 마을이야기를 담아내는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개발의 바람 속에 사라져 가는 우도의 옛 모습 속에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성찰해 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의 앨범을 뒤져 과거 우도의 모습을 찾아봤다. 마을잔칫날 모습과 어우러져 체육대회를 하던 모습들이 담겨있었다. 지금은 잊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공유하고 자료화 해 남겨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전시로 이끌어냈다. 앞으로도 이런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마을 공동체를 위한 노력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열악한 시절 뒤로 사정 많이 나아져”정영철(조일리 전 이장)
1947년생으로 조일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 과거에는 각지불로 불을 지피던 열악한 시절을 살았다. 이후 자가발전으로 전깃불이 들어왔지만 이마저도 밤 12시가 되면 소등을 해야 했다. 물 또한 귀했다. 동네마다 큰 물통을 만들어 빗물을 받아 사용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허벅을 지고 와서 물통에서 물을 길어가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용천수도 귀했다. 바위틈에서 나는 물인 조금바위 물로 목욕을 했다. 이후 담수장 조성으로 조금 숨통이 트이긴 했으나 수질이 좋지 않아 머리를 감으면 뻑뻑했다. 2010년 이후 본섬에서 물을 끌어와 상수도 시설이 되면서 물 사정이 좋아졌다.
과거 우도는 반농반어 생활을 했다. 쌀보리, 고구마, 조 등의 농사를 지었다. 이때 듬북 등의 바다 해초를 밑거름으로 썼다. 해녀들이 물에 들어가면 전복, 소라 등을 캐온다. 물건이 좋을 때는 1.5㎏짜리 전복을 건져 올리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전복을 볼 수 없다.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했었는데, 요즘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뱃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 돼지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 정도 에나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연말에 갑회 때면 돼지를 추렴해 나누는 게 큰 행사가 되곤 했다.
출생지가 우도 비양동이다보니 늘 아침 일출을 제일 먼저 맞는다. 가끔 배를 타고 나가면 우도 팔경인 주간명월을 보게 된다.
<글·사진=조미영(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