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모노레일 기차 안에서 아키라는 여행용 가방을 쓰다듬는다. 세상 해탈한 눈빛을 가진 남루한 이 아이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낙상사고로 다쳤지만 손써 볼 수 없어 죽은 막내를 데리고 비행기를 보여주러 가는 길이다. 오빠는 비행기가 뜨고 지는 공항 근처 강가에 동생을 가방째 파묻는다. 아이는 유령처럼 살다가 유령이 됐다. 이사하던 날, 엄마는 장남만 주인집에 소개한다. 셋째와 넷째는 여행용가방에 숨어 이삿짐과 함께 들어오고, 둘째는 어두워져서야 겨우 주변의 눈을 피해 숨죽여 들어온다. 다섯 식구의 오붓한 저녁시간, 맛난 밥을 먹으며 엄마는 소리 내지 말고 밖은 물론 심지어 베란다에도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세상에 없는 듯 살아야한다. 즐겁고 따뜻하지만 답답하고 서글퍼지는 풍경이다. 아이들은 이미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듯하다. 천진하지만 의젓하고 장난꾸러기지만 불평이 없다.
얼마 후, 엄마는 떠났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돌아오겠다는 메모와 약간의 돈을 남기고. 아이들은 저들만 살아간다. 감당하기 벅찬 시간들을 서로 의지하며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견딘다. 생활비가 바닥나고 단전단수가 되자 극한의 궁핍으로 아이들의 삶은 무너져 내리지만 '아무도 모른다'. 엄마는 끝내 오지 않는다. 다시 얼마의 돈과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는 짧은 편지가 왔을 뿐. 아키라는 고작 12세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고 방관하며 철없고 무책임하다. 엄마는 너무 멀리, 간 데 몰라 절망적이다. 원망하고 공분할 대상으로조차 희미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이다. 실화가 바탕이지만 픽션이다. 절제된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면서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들의 순수함까지 담담히 그려낸 수작이다.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힘들었다. 이건 영화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 아기를 판다는 광고가 뜬다. 입양된 16개월 아기는 학대의 흔적 고스란히 담긴 사진 몇 장으로 남았다. 사슬에 묶여있던 아이는 창문을 통해 도망쳐 나와 도움을 요청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7시간을 여행용 가방에 가두고 폭행해 아이가 죽더니, 출생신고 없이 그림자로 살다가 엄마 손에 살해돼 '무명씨'로 화장된 8세 인생도 있다. 낱낱이 모두, 마치 영화다. 엽기 호러에 가깝다. 영화는 오히려 따뜻하다.
세상 첫 말은 아마도 '엄마'였을 텐데, 짧게 살다간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 아이들에게도 제제의 라임오렌지나무 같은 '밍기뉴'가 있었을까. 친절한 '뽀르뚜까'가 있었을까. 있다한들 어마어마한 폭력 앞에서 무슨 소용이 되기는 할까. '제대로 어른'이거나 '좋은 이웃'이기에는 너무 부끄럽다. 청와대사이트 청원에 '동의'를 꾹 누른다. 울컥 복받친다. 오늘 울고 있는 이들 모두, 슬퍼하거나 미안해하거나 분노하는 일 이상의 일을 해야겠다.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 말자. 숨겨지고 방치된 아이들을 찾아내야겠고 더 엄한 처벌도 필요하겠고 사회안전망과 법은 더 촘촘해지고 구체적이어야겠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도 이제는 너무 자주해서 면목 없지 않은가. 남겨진 몇 장의 사진 속 해맑은 웃음이 가슴을 친다. 아이가 말한다. '날 기억해 주세요.' <김문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