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나로 사는 일
  • 입력 : 2021. 05.21(금)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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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

나는 자타공인 확신의 맥시멀 리스트다. 사는 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니 집은 늘 발 디딜 틈, 눈 돌릴 틈 없이 빽빽하다. 벽이 휑한 채로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영화 포스터며 사진과 엽서, 심지어 초등학교 시절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들도 벽에 붙어있다. 한 때는 50여 개가 넘는 화분에 각기 다른 식물들과 함께 살았다. 책장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은 바닥부터 천정까지 탑을 쌓았고 빈 향수병과 와인병들에는 생화와 마른 꽃이 꽂혀 있었다. 물론 새 향수병과 새 와인병 또한 함께 있다. 이런 나의 집안 꼴을 볼 때마다 엄마는 질색을 하셨고 친구들은 아연실색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내 집이 좋았다.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동물들이 자기 영역을 분뇨로 표시하듯 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의 공간에 채워 넣으며 한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충족감을 느꼈다. 외출해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모든 것들이 익숙하고 동시에 새로웠다. 원래 있던 친구들이 새로 들어온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 살폈고 그 안에서 나도 소속의 일원으로 편안하고 분주했다.

 그래서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주인공 펀이 집으로 살던 밴이 고장 났을 때, 새로 사는 것이 수리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수리공으로부터 들었을 때 펀이 느낀 절망의 감정을 알 것 같았다. 영화 속 펀의 '그건 단순한 차가 아니라 시간과 돈을 들인 나의 집'이라는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집인 동시에 친구이고 나이기도 한 공간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펀의 마음에 바로 공감할 수 있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노매드랜드'는 경제적 붕괴로 황폐해진 도시를 작은 밴과 함께 떠나는 노매드 여성 펀의 여정을 담고 있는 영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와 함께했던 터전 또한 잃은 펀의 곁에는 오직 작은 밴 만이 남아 있다. 세월의 모든 것을 담고 움직일 수 없기에 그 공간에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들과 언제나 필요한 것들이 함께 있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전자이고 먹고사는 매일의 모든 순간에 필요한 것들이 후자의 영역이다. 움직이는 집 위에서 사는 삶은 녹록지 않다. 불편한 것이 기본이고 불쾌한 순간들이 옵션이다. 아무 곳에나 정박할 수 없는 매일의 밤에 잠을 설치고 아무나 들여다보는 시선의 습격에 펀의 몸과 마음이 덜컹거린다. 재난처럼 찾아온 삶의 붕괴 이후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쉽지가 않다. 일자리는 구해지지 않고 수중에 있는 돈은 조금씩, 빠르게 사라져 간다.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작은 것도 구하기 어려운 길 위의 삶. 그 절망의 아지랑이에서 펀은 자신과 다르지만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다.

 길 위에서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그리고 다시 만나리라는 믿음을 간직한 또 다른 노매드들이 펀의 친구가 된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집과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마치 펀처럼 그들은 공들여 길 위에 집에 시간과 마음을 쓴다. 그 마음의 씀씀이는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상대가 모르는 길을 가르쳐준다. 아마 그것은 상대의 마음에 묻혀진 무언가를 닦아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로 내려앉은 자욱하고 심지어 무겁기까지 한 먼지를 서로를 위해 조금씩 닦아주고 걷어낼 때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작은 돌처럼 모여있는 사람들은 그 또한 말갛게 자연의 일부가 된다. 제철을 맞은 어떤 것들이 찾아오고 또 떠나는 것처럼 노매드들은 머무를 수 있는 만큼의 삶을 그렇게 홀로, 함께 살아간다.

 내가 나의 집 안에 무언가를 들이는 것처럼 길 위의 사람들도 창을 열어 햇살을 들이고 바람을 맞는다. 또한 소중한 것들을 더하기 위해 애를 쓴다. 유한한 삶과 한정된 공간에서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은 결국 나로 살기 위한 고심일 것이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없기에 어떤 것은 떠나보내야 한다.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의 후반부 펀의 선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선택의 장면에서 마음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펀이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로 사는 일은 결국 내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주저앉고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 역시 오직 나만이 느끼는 생의 감각이다. 아마도 평생을 내가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닮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속한 공간과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연을 차례로 만나면서 결국 우리는 나로 사는 여정의 순간들을 겪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종착점이 어디인지,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도착한다면 그곳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오로지 나 자신뿐일 것이다. 그 온전한 고독의 순간이 되어서야 조금은 선명한 내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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