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제주4·3 그린 한강의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

[책세상] 제주4·3 그린 한강의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
아직 헤어질 수 없기에, 잊을 수 없기에
  • 입력 : 2021. 09.17(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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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와 살에 얽힌 수많은 사연
돌아가 껴안을 사람을 위해
낙인과 공포 속 고요한 투쟁

미체험 세대인 경하와 인선
눈송이 매개 공감과 연대로
오래전 먼 곳에도 내렸으리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그가 5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의 온 마음이 이 대목에 스며있다고 느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간절한 사랑의 이야기로 어제와 오늘을 잇고 있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2014년 6월에 이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썼다는 작가는 2018년 세밑에야 그다음을 이어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과 작가의 삶이 묶여 있던 시간을 7년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채식주의자'로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했던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2014), '흰'(2016) 등에 이어 단행본으로 내놓은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연장선에서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으로 다시 인간의 존엄을 말한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벌어진 비극적 역사, 제주4·3을 통해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제주 바다에서, 어느 마을 국민학교 운동장 옆 보리밭에서, 입구가 좁은 동굴에서, 활주로 아래에서 뼈와 살들의 사연을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4월'로 통칭되는 70여 년 전 그 시기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기에. 주인공 '나'로 나오는 소설가 경하, 4·3에 얽힌 가족사를 안은 숱한 제주사람 중의 한 명인 사진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하의 친구 인선은 꿈과 현실을 오가며 먼저 떠난 이들을 우리 앞에 불러낸다. 미체험 세대인 두 사람은 소설 속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란 다큐멘터리 작업을 구상하며 때때로 제주 방언으로 전하는 생존희생자들의 음성을 실어나른다.

눈송이는 인선의 엄마 정심이 열세 살 어느 겨울날 군경에 의해 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몰살당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에 비극의 매개로 등장한다. 정심과 정심의 언니는 주검의 얼굴 위에 눈송이가 얇게 덮여 얼어 있던 탓에 그것들을 일일이 닦으며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눈발은 수십 년을 뛰어넘어 다시 제주 하늘에 휘날린다. 목공 일을 하다 두 손가락이 잘린 인선을 대신해 혼자 남은 새를 구하려 인선이 머물던 제주 집으로 향하던 경하는 눈길에서 생각한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눈송이는 어느새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존재가 되어 공감과 연대로 확장된다.

소설은 인선의 엄마를 따라 지역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이 군경에 의해 집단 희생됐던 1950년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까지 닿는다. 이 여정에서 정심이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길고 고요한 투쟁을 이어온 사실이 드러난다. 입을 떼는 순간 휴전선 너머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오래도록 침묵해야 했던 현실에서도 정심은 오빠와 작별할 수 없었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획을 45도로 꺾어서 썼던 정심의 필체처럼 소설 곳곳엔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서체로 된 구절들이 자리하고 있다. 정심과 인선, 경하, 또는 증언자들의 목소리로 표출되는 그것들은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신형철)

한강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문학동네.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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