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15)아이맥과 나이 들기

[황학주의 제주살이] (15)아이맥과 나이 들기
  • 입력 : 2021. 12.21(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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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된 아트 포스터를 만들다 눈이 쏟아지는 바람에 마당에 나와 눈 사진을 찍었다. 누런 잔디 위에 내리고 궁굴리고 휩쓸리는 눈 구경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도 리듬이 있고 마치 어휘의 배열처럼 흐름이 따르며 즉흥적인 시구(詩句)처럼 자유로이 솟구쳐오르기도 한다. 바람이 너무 세차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옷에서 방금 맞은 눈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한라산이 보이는 앞마당에선 쏟아지는 눈발이 춤을 추지만, 바다가 보이는 거실 창 쪽에선 귤밭 사이로 성긴 눈발이 희끗희끗 날린다. 이 대조적인 앞뒤 풍경은 우리집의 위치와 제주의 지형이 만들어낸 마술이다.

시를 쓸 땐 종이 메모장과 시작노트를 이용하지만, 나의 업무 도구는 테이블에 올려진 27인치 아이맥(iMac)이다. 맥은 영상 작업 및 음악 편집 작업에도 많이 사용되지만 나는 책 편집 및 포스터, 아트 굿즈 등을 제작하는데 이 맥을 사용한다. 오랫동안 이동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했고, 좀 더 확실하게 마음이 담긴 일을 하고 싶어 했던 나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도구가 바로 맥이었다.

파일 메뉴에서 만들다 둔 '아트 포스터'를 클릭해 끄집어낸다. 컬러, 그리드, 타이포그라피를 활용해 문구와 이미지, 바탕색 등을 최대한 감각적으로 배치하고 원화 그림의 색감이 주는 감정 이미지를 가장 중요하게 구현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콘셉트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상당히 디테일하게 반영한 시안을 사무실로 보내 디자이너의 전문적인 작업을 거치게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

벌써 옛날이야기이긴 하지만, 대학원에서 가르침을 받은 시인 이승훈 선생님은 술잔을 나눌 때 종종 나에게 "황형은 스타일리스트야." 라고 하셨다. 처음엔 그 말이 나의 차림새와 연관된 것인가 싶어 가난하던 시절 입고 다니는 옷이 뻔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중에 여쭈어보니 '미(美)의 기획자'라는 의미로 쓰셨다고 했다. 그 후 평론가들은 나의 시를 이야기할 때 미학주의라고 했고, 혹자는 미학주의와 연금술의 융합이라는 다소 불편한 과찬을 했다. 나에 관해 꽤 긴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요지는 미적 맥락이 나의 뇌리와 삶 속에 늘 들어 있어 나는 시 못지않게 그림이나 디자인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서울에서 문음사나 미학사 등 출판사 편집주간을 할 때 장정일, 고은, 조병화 등의 시집과 산문집 표지를 내가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30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도 나는 배울 게 있어서 이런 작업이 좋다. 그렇다고 내가 SNS를 즐기는 그런 체질은 아니다.

남산 자락 인쇄 골목들이 얽히고설킨 필동에서 8년 하던 '발견'도 이제 때려치웠지만, 내가 좋아서 혹은 가슴속에 남아 있어서 집에서 혼자 아름답게 뭔가 만들어보는 데에 맥이 유용하다. 약간의 수입도 된다. 일해서 모은 돈은 없지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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