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뿌려 사라진 유해…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바다에 뿌려 사라진 유해…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31일 제주4·3연구소 주최로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열려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 희생자 가족 3명 참여 '그날' 처음으로 증언
함복순씨 "오빠는 나를 알아볼 테지만 나는 오빠가 누군지 몰라 울어"
  • 입력 : 2022. 03.31(목) 18:25
  • 김도영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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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희생자 유가족 함복순 씨가 74년 전 잃어버린 오빠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이상국기자

"다랑쉬에는 나무도 하러 가고 고사리도 꺾으러 다녔다. 거기에 오빠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주4·3희생자 유가족 함복순(80·구좌읍 종달리) 씨. 당시 6살이었던 함 씨는 4·3으로 오빠를 잃고 가족들이 무너졌던 그날을 마치 어제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며 처음으로 아픔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제주 4·3의 생생한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스물한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이 열렸다. 제주 4·3연구소는 31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아! 다랑쉬 굴 밖 30년 이우다'를 주제로 증언본풀이 마당을 개최했다.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에는 1992년 발굴된 다랑쉬굴 11구 유해와 관련된 3명의 4·3희생자 가족들이 참석해 그 시절의 기억과 아픔을 증언했다. 함 씨와 함께 고관선(76·종달리)·이공수(86·하도리)씨가 참여했다.

함복순 씨는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4·3희생자 함명립(당시 20세) 씨의 여동생이다. 오빠가 지붕 속에 숨어 지내다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지자 온 가족들이 오빠를 찾아 나서며 비극이 시작됐다. 함 씨는 "나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던 막내딸이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울고 있었다. 왜 우냐고 묻자 오빠가 사라졌다고 말했다"며 "오빠를 찾아 나선 아버지는 세화지서에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했고 어머니는 도피자 가족이라 낙인찍혀 1948년 12월 상도리 연두망에서 학살당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나중에 다랑쉬굴 유해 중에 오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갔다. 유해들을 보며 '오빠는 나를 알아볼 텐데… 나는 오빠가 누군지 몰라' 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증언했다.

화장된 오빠의 유해를 직접 김녕 바다에 뿌렸다는 함 씨는 "바다에 가 뿌려서 아무것도 없다. 비석만이 남아있는데, 이제는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한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예전엔 살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폭도'라 부르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찢어졌다. 이제는 '희생자'라 불러줘서 그나마 마음이 풀어진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희생자와 가족들의 명예 회복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4·3희생자 유가족 고관선(왼쪽) 씨와 이공수(오른쪽) 씨. 이상국기자

고관선씨 "지금 같으면 화장 안 했을 것… 힘이 없었던 시대"

다랑쉬굴 희생자 고태원(당시 26세) 씨의 아들 고관선 씨는 가장 후회되는 일이 아버지의 유해를 화장한 것이라 했다. 고 씨는 "아버지가 다랑쉬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울었다"며 "지금 같으면 화장을 안 했을 거다. 당시 시대가 시대였고 힘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다랑쉬굴이 제주4·3을 밝히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다른 마을도 말해야겠다는 분위기가 생겼다"며 "다랑쉬라는 4·3의 현장이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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