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31)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황학주의 제주살이] (31)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 입력 : 2022. 04.26(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오정희의 소설에는 저녁이라는 시간대가 자주 묘사됩니다. 슬금슬금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 한 여자가 우두커니 아파트 창가에 서서 산다는 것의 허무한 심연의 바닥을 내려다봅니다. 그러다가 밤늦은 시간에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남편을 가로등 불빛 속에서 발견하지요. 그 순간 깜짝 놀라며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과연 내 남편인가. 그것을 알 수 없어서 슬픔에 빠집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여자가 맡도록 의무 지어진 그 의무가 가져오는 탄식과 한숨이 애잔하게 깔립니다.

시집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에는 제주에 와서 쓴 시들이 많고, 어떤 식으로든 제주가 많은 배경을 이룹니다. 그리고 '노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오정희의 저녁과는 좀 다른 의미로 주로 사랑, 늙음, 죽음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런 시일수록 알레고리가 자주 끼어들어 사랑 뒤에서 쫓아오는 시간에 눈길을 줍니다.

나는 사랑에 대해서 무얼 알고 있을까.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나,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지만, 언어학적인 측면에선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언어로 지칭했을 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란 언어는 또한 무엇일까요.

독자는 이 시집의 여러 군데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저는 사랑의 감정을 매우 신비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이성을 넘어서는 영성이라고 믿어지는 것도 그 대목입니다. 어떤 감정이 일생동안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술의 욕망은 이런 지점에서 극적으로 탄생할 수 있고요, 그 운명적인 사로잡힘과 간절함이 파생시키는 곡절과 과정을 추상이 아니라 구체로 거칠 때 큰 사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시에서 사랑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사랑의 강력한 감정은 좋은 시의 필요조건이긴 하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감정의 노출이 잘못되면 시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아는 시인들이 사랑시 쓰기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지요. 그렇지만 어떤 메마른 현실에 대면해서도 감각과 정신을 시적 상태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정희의 허무한 '저녁'이 내게도 오기 전에 사랑에 대한 헌신, 사랑을 진보시키고자 하는 마음과 진정한 자유가 자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문제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의 문제는 내게 사랑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41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