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희의 백록담] 숨 멎은 도심 벚나무에서 마을을 보다

[진선희의 백록담] 숨 멎은 도심 벚나무에서 마을을 보다
  • 입력 : 2022. 05.02(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시작은 지난 3월 16일 제주시장실 밖으로 터져 나온 고성이었다. 연동 제성마을 사람 4명이 제주시가 도로 확장을 이유로 전날 가로변에 있던 벚나무들을 베어냈다며 시장실을 찾아 항의한 거였다. 제주시장의 진심 어린 사과와 행정의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의 사연을 따라가는 동안 여러 문제들이 포개졌다. 가로수가 아닌 나무들의 처지가 그 하나이고, 오늘날 다시금 뜨거운 현안이 된 공항 건설이 또 다른 하나다. 무엇보다 마을의 목소리는 어떻게 모아지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겼다.

3월 기준 제주시의 가로수는 후박나무 등 32종 4만697그루에 달한다. 도로 공사 등으로 가로수를 벌채하거나 이식해야 할 경우 관련 법이나 조례에 따라 건설, 녹지 등 지자체 관계 부서를 중심으로 승인과 협의가 이뤄진다. 제주시는 지난해에도 이 같은 절차에 의해 57건을 다뤘고 148그루를 다른 곳에 옮겨심었다.

이번에 사라진 제성마을 벚나무는 지자체가 관여하는 가로수가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이 다른 마을에 터를 잡으며 이를 기념해 자체적으로 심은 것으로 행정 당국의 눈에는 보호 대상에서 벗어난 도심의 수목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자체의 관리 목록에 없다고 존재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제성마을에 정착한 이들은 봄이면 연분홍 꽃을 피워내던 벚나무를 끔찍이 보살폈다. 그래서 나이 90을 눈앞에 둔 마을 주민은 40살이 넘은 벚나무가 잘려나가던 순간 마치 가족이 그와 똑같은 고통을 겪는 것처럼 느꼈다.

도두 해안도로엔 1999년 4월 '몰래물 애향회'가 세운 빗돌이 서 있다. 비문에는 1899년 이래 사수촌으로 불렸던 마을이 1941년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이 비행장을 짓게 되자 주변 농토와 가옥이 강제 수용당해 동서, 신구(新舊) 몰래물로 분산되는 "치욕적인 원한의 생활"을 경험했다고 적혔다. 1978년 제주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승격되는 과정엔 구 몰래물이 수용당하고, 신몰래물은 항공기 이착륙 소음 공해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제성마을도 당시 몰래물에서 이주한 지역 중 한 곳이다. 마을 입구 벚나무는 그런 아픔 속에 마지막 희망을 꿈꾸며 새로운 정착지에 뿌리를 내렸지만 지난 봄날 숨이 끊겼다. 그래서 벚나무의 역사를 알고 있는 제성마을 사람들은 벌채를 두고 슬픔과 분노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2020년 8월 제성마을회 총회에서 벚나무 벌채 반대 의견을 모으고 제주시에 뜻을 전달해왔음에도 통장의 말만 듣고 공사를 진행했다고 주장하며 일부 지역민들은 근래 대책위원회까지 꾸렸다.

지난달 한라일보 창간 33주년 기념호에서 선보인 '제주 마을-참여와 자치의 기록'은 제성마을 벚나무 취재가 계기였다. 마을에서조차 그 땅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외면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혹여 여성이어서, 노인이어서, 그 수가 적어서 그런 거라면. 그게 아니길 바라며 제주 마을로 향하고자 한다. <진선희 행정사회부국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6017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