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기적의 남자(김동승)

[2023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기적의 남자(김동승)
  • 입력 : 2023. 01.02(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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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가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찾았다.

[김덕수 씨? 관악경찰서 박래신 형사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무슨 일이시죠?]

덕수는 잠시 보이스피싱인가 싶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은행 대출이나 검찰, 부모님의 사고 같은 흔한 레퍼토리가 나오면 가차 없이 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덕기 씨 아시죠?]

예상치 못한 형사의 질문에 덕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이덕기? 이덕기? 이덕기! 10초 정도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이름이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덕기, 병원 사람들은 그를 이기적이라 불렀다. 이름 전체로 부르면 의도치 않게 비난하는 꼴이 되어, 성을 떼고 기적 씨로 부르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예전 담당했던 환자로 기억합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3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예?]

낯선 사람이 전하는 죽음의 소식은 덕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런데 왜 제게 전화를…….]

[자세한 사항은 아직 조사 중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김덕수 씨께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고인의 집을 조사하던 중에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 고인이 김덕수 씨로부터 돌려받았으면 하는 물건이 있다고 적혀 있는데 혹시 짐작 가는 게 없으신가요? 내일 오전에 잠시 서에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전혀요. 저는 환자분하고 사적으로 교류한다든지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내일 서에서 자세하게 말씀 나누시죠.]

덕수는 통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수화기를 쳐다보았다. 혹시 신종 사기 수법인가 싶어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방금 통화했던 형사를 찾았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내일 오전 11시까지 방문하라고 말했다. 통화 이후 그는 통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노령 환자들의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침대 위의 체위를 변경하거나 스트레칭을 거들 때도 생각은 전화에 팔린 상태였다. 하루 꼬박 기억에 불을 지피자 밑바닥에 있던 것들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덕기, 그는 덕수가 일평생 만난 사람 중 가장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장 운이 나빴던 사람이었다.

*

덕수는 처음 서울을 보던 순간을 기억했다. 7살 여동생은 그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자고 있었고 아빠와 낯선 운전사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달 트럭에 엉기성기 쌓여있는 세간이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출발하기 전 조였던 끈들이 풀어질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새벽 어스름 사이로 대도시의 마천루가 위용을 드러내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서울이었다. 아빠의 일자리가 가득할 서울. 동생이 다닐 큰 학교가 있는 서울. 그리고 어릴 적 홀연히 사라진 엄마가 갔다고 한 서울.

그들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살았다. 달동네라고 부르는 그곳에서는 우뚝 솟은 건물 옥상에서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는 회사원이 점점이 보였다. 한동안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았다. 아빠가 일하고 덕수도 돈벌이를 거들고 동생은 학교에 다니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을 믿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빠는 두 팔을 잃었다. 일당 삼만 오천원을 더 벌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전기배선을 만진 대가였다. 아빠가 통증에 못 이겨 발광하는 날에는 덕수가 동생을 데리고 집 밖에 나와 있어야 했다. 갈 곳은 한군데뿐이었다. 둘은 동네 초입의 구멍가게로 향했다. 편의점에 손님을 다 뺏겨 을씨년스러운 그곳에는 까맣게 썩은 나무판자에 모노륨 장판을 덧댄 평상과 브라운관 TV가 있었다. 가로등 불빛만으로는 부족한 어두운 골목에서 TV는 유일하게 빛을 보태고 있었다. 빛에 몰려드는 벌레들과 함께 덕수와 동생은 평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TV에서는 복권 추첨 방송이 한창이었다. 복권 희망 사업으로 웃는 아이들. 복권이 당첨되어 웃을 사람들. 화면을 보는 덕수는 잠시 마주하고 있으면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나고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는 따듯한 물을 마신 듯 손바닥에서 온기를 느꼈고 그 손으로 여동생의 왼손을 말없이 감싸 쥐었다. 어둠을 비집고 브라운관 TV의 빛이 그들의 포개진 손 위에서 고요히 출렁이고 있었다.

"이덕기 씨 아시죠?" "3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낯선 사람이 전하는 죽음의 소식은 덕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덕수가 일평생 만난 사람 중 가장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장 운이 나빴던 사람이었다

삽화=정지란 작가

*

덕수가 요양보호사로서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이제야 번듯한 일자리를 얻었다는 자부심과 업무를 익히며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한 인간일 수도 있겠다고 하는 자괴감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왕복하는 일상이었다. 새로 배정받은 8층으로 출근하자마자 어제 마무리해서 제출했어야 할 인수인계일지의 오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복도 중간에 있는 직원 데스크로 남성 환자 한 명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똑똑, 이봐."

그의 반응이 없자 환자는 직접 입으로 똑똑, 하고 소리를 냈다. 덕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서리가 앉은 것 같은 백발의 머리에 피부는 누런빛을 띠면서 거칠었다. 매부리코에 이가 고르지 못하고 군데군데 까맣게 썩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은 눈이었는데 서늘한 기운이 감돌며 속이 맑고 깊어 보였다. 얼굴 전체로 보면 누런 사막에 푸른 오아시스 두 개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이것 좀 한번 봐주겠어?"

환자가 덕수에게 내민 것은 낡은 즉석 복권 한 장이었다. "최고당첨금 10억"이라는 문구가 금색으로 왼쪽에 휘황찬란하게 적혀 있었다. "행운그림 2개가 모두 일치하면 당첨." 당첨의 조건이었다. 그 아래로 그림 2쌍과 옆으로 당첨금액이 작게 적혀 있었다. 덕수는 위에서부터 하나씩 그림을 훑어보며 내려갔다. 첫 번째는 새와 그림 그리고 사천 원. 낙첨. 두 번째는 선물과 카드 그리고 일천만 원. 낙첨. 세 번째는 책과 리본 그리고 일십만 원. 낙첨. 네 번째는 하트와 케이크 그리고 일억 원. 낙첨. 다섯 번째는 돼지와 돼지 그리고 일십억 원. 당첨. 어? 어? 어? 어! 덕수는 너무 놀라, 말을 버벅댔다.

"맞지? 그렇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지?"

환자는 덕수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서야 당첨을 확신한 듯 기쁨의 쾌재를 불렀다. 그는 온 복도가 떠나가라 환호했다. 덕수는 옆에서 손뼉을 치며 대박, 이라는 말을 연발했다. 감정이 고조된 듯 환자는 복도 바닥에 앉아 눈물을 보였다. 그러면서 됐어, 이제 할 수 있어, 라는 말을 연신 되풀이했다. 한동안 훨훨 날던 그는 감정이 추슬러지자 복권을 환자복 주머니에 집어넣고, 마치 잊어버린 것을 가지러 가는 사람처럼 날랜 걸음으로 병실에 되돌아갔다. 복도는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만, 덕수의 날뛰었던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같은 요양보호사이자 사수인 박 선생이었다. 뭐하냐는 질문에 덕수는 말을 버벅대며 조금 전의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박 선생은 웃으며 이야기했다.

"김 선생 8층은 처음이지? 저 양반 유명해. '기적' 씨라고. 저 환자 차트는 봤어?"

덕수는 박 선생이 건네는 차트를 받아 환자 정보란을 보았다. 이름 이덕기. 나이 71세. 교통사고로 인한 외상성 치매.

"그래도 아까 그 복권은……."

말이 끝나기 전에 기적 씨가 병실에서 나와 데스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환자복이 아닌 낡은 회색 점퍼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박 선생은 벽에 붙은 시계를 보고는 오늘은 되게 빠르네, 하고 혼잣말했다.

"이덕기 환자분, 어디 가세요? 의사 선생님 외출 허가는 받으셨어요?"

"이봐,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이거 좀 봐봐. 자그마치 10억이야, 10억. 여기 젊은 선생이 봤는데, 당첨된 게 확실한 거란 말이야."

"그 복권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박 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떨리는 손에서 복권을 건네받은 그는 데면데면 보고서는 손가락으로 지급 기한을 가리켰다.

지급 기한 2019년 4월 30일.

"이 복권은 이미 지급 기한을 넘어서 무용지물이에요. 여기 달력 보이시죠? 지금 2021년이에요."

기적 씨는 충격을 받은 듯 복권과 덕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박 선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빨리 반박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박 선생의 말이 옳았다. 복권의 뒷면에는 약관이 있었다. 약관에는 앞면의 지급 기한까지 청구하지 않으면 효력이 소멸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덕수는 난감한 상황에 혀가 꼬여 다시 버벅대며 말했다.

"아…… 이덕기 환자분, 박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이게 당첨은 맞는데, 지급 기한이 지나서 사용할 수가 없네요. 기한이 지나면 당첨금이 복권기금에 귀속되어 공익사업에 사용한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덕수는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목덜미 밑에 멱살을 잡고 흔드는 우악스러운 손 두 개가 보였다.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 있던 서늘한 오아시스는 온데간데없이 불꽃을 뿜는 활화산 두 개가 눈앞에서 분출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덕기 씨, 아니 기적 씨와 덕수의 첫 만남이었다.

*

그날 저녁 덕수의 입사 기념 겸 오전 멱살잡이 위로의 취지로 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다. 박 선생은 40대 중반에 명예퇴직 후 요양보호사로서 10년 가까이 일 해온 베테랑이었다. 50대 중반의 남자와 20대 후반의 남자가 할 수 있는 대화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저녁 식사에 반주가 조금 들어가고 나서 그들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회식 자리를 만들어 준 기적 씨로 향했다. 박 선생이 이야기하는 기적 씨의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기적 씨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대기업에서 생산하는 TV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자였으며 규모도 제법 큰 공장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의 기적 씨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IMF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 오기까지는. 철옹성 같던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부도로 사라졌다. 동시에 대기업이 보증하던 어음들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납품하지 못한 제품이 창고에 먼지와 함께 쌓이고, 덩달아 지급해야 할 자재 대금과 직원들의 임금도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공장을 팔고, 차를 팔고, 집을 팔고, 나중에는 자신의 신용도 팔았다. 친척, 친구, 친한 지인들, 관계에 '친' 자가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 돈. 돈. 돈. 결국, 기적 씨는 고발장과 사람들의 원망을 피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쳤다. 완벽한 증발이었다. 수년간 거리를 전전하던 그는 운 좋게 만난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얼마간의 정부 보조금과 기거할 거처를 얻었다. 하지만 오랜 거리 생활로 그의 마음은 이미 황폐화되어 있었다. 자신이 돈을 빌린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손을 벌릴 것 같은 망상은 그를 사람 대신 사물과 대면하게 했다. 이후 그는 길거리에서 고물이나 폐지 등을 주워 팔며 근근이 삶을 이어갔다. 그는 항상 아는 곳으로만 다니며 일정한 순서에 따라 폐지를 주웠다. 오후 3시까지 동네를 돌고 나서 어느 정도 폐지가 모이면 고물상으로 향했다. 대게 하루에 버는 그의 수입은 오천 원 정도. 그는 거의 매일 시장 골목에 있는 이천 원짜리 칼국수로 점심 겸 저녁을 때우고 천 팔백원짜리 소주 한 병을 샀다. 그러면 수중에는 천 원 남 짓 남는데 그 돈으로 즉석 복권을 샀다. 대로변 가게 앞 파라솔에 딸린 간이의자에서 소주를 마시며 복권을 긁는 것이 그의 마지막 일과였다. 그날도 기적 씨는 순서에 따라 서점에 먼저 들렀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게 셔터가 반쯤 내려와 있고 그 앞에 종이 상자들과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간 그에게 서점 주인이 손짓했다. 폐점으로 버리는 것이니 가져가란 주인의 말에 기적 씨는 고물상으로 잽싸게 달려가 손수레 한 대를 빌렸다. 실로 오랜만에 용을 쓰며 일했다. 손수레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사람을 그렇게 기분 좋게 할 수 없었다. 고물상을 나오는 그의 손에서 세종대왕이 웃고 있었다. 만원. 공치는 날을 생각하면 이틀 아니 삼일 동네를 돌아야 운 좋게 만질 수 있는 돈이었다. 기적씨가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도 넘지 않았다. 운이 트이는 날이었다. 그는 칼국수 가게를 지나 오천 원짜리 순댓국 가게로 들어갔다. 오래간만에 뱃속에 따듯한 밥과 고기가 들어가니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가게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샀다. 잠시 망설이던 기적 씨는 소주와 먹을 마른오징어 안주를 포기하고 남은 삼천 원 전부 즉석 복권을 샀다. 간이의자에 앉아 첫 번째 복권을 정성 들여 살살 긁었다. 일천 원 당첨. 과연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두 번째 복권을 긁었다. 낙첨.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복권을 쳐다보았다. 기적 씨는 "최고당첨금 10억"이라는 황금색 글자가 빛에 번뜩이는 것 같았다.

"이봐, 김 선생. 그동안 참 신세 많이 졌어. 이제 나한테
의미 없는 물건이니 자네가 처분해 주게."
복권을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것이 덕수가 본 기적 씨의 마지막이었다

삽화=정지란 작가

비범한 기운을 느끼며 복권을 긁는 순간, 그는 저 멀리 대로변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사실 비범한 기운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서 나온 번쩍임이자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의 운전자가 보낸 다급한 경고였다. 기적 씨는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진 탓에 그는 이송 후 10개월간 의식 없이 살았다. 그의 담당의가 뇌사 판정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던 즈음, 기적 씨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2개월이 더 지나 사고가 발생한 지 1년 가까이 될 무렵 기적 씨는 지금의 요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서랍 안의 사복을 정리하다 긁지 않은 복권 한 장을 발견했다.

*

덕수가 근무하는 병원의 층별 데스크는 간호사 1명과 요양보호사 2인의 3인 1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8층은 30대 후반 여성인 한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로서 박 선생, 그리고 덕수가 한 조로 근무했다. 3명은 죽이 꽤 잘 맞았는데 그것은 같은 환난을 겪는 동지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데스크 직원들은 환자들의 오침이나 단체 프로그램 등으로 한가한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호사를 누렸겠지만, 그들에겐 기적 씨가 있었다. 8층은 모두가 근무를 기피하는 장소이자 덕수 같은 신입직원이 직무의 혹독함을 수련하는 장소로 악명이 자자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8층의 3명은 기적 씨의 증상에 따라 규칙 하나를 창안했다. 일명 천사와 악마.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3명은 아침 근무 전 그날의 일과를 정리하며 사다리 게임을 한다. 선택지는 천사, 악마 그리고 행운의 꽝. 그날의 악마로 선택된 사람은 우선 준비한다. 어떠한 감정의 풍파가 있더라도 반드시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의 준비. 아침 9시가 되면 기적 씨가 저 멀리서 데스크로 다가온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설렘과 두려움을 띠며 그는 복권 한 장을 우리에게 건넨다. 먼저 천사가 나서서 그의 복권을 살펴보고는 당첨 사실을 말해 준다. 그 뒤로 행복, 황홀, 환희 같은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기적 씨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만약 그의 감정을 추출해서 약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우울증이란 병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긍정의 감정들은 오전 내내 지속된다. 그동안 천사는 당첨 사실을 확인, 재확인, 재재확인, 재재재확인 해 주거나 기적 씨의 희망찬 미래 계획을 듣는 것으로 그의 소임을 다한다. 그러다 오후 4시쯤 되면 평상복을 입은 기적 씨가 데스크로 다가온다. 악마의 차례다. 은행으로 가겠다는 기적 씨에게 악마는 현실을 말해준다. 그 뒤로는 절망, 나락, 비탄 같은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악마를 덮친다. 재수 없다면 머리채나 멱살을 잡아채는 손이 있을 수 있으니 악마는 특히 주의할 것.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악마는 기적 씨의 분노, 재분노, 재재분노, 재재재분노의 대상이 되어 너덜너덜한 욕받이가 되는 것으로 그의 소임을 다 한다.

3일 연속으로 악마에 걸린 후 덕수가 처음 천사가 된 날이었다. 그는 볼멘소리로 박 선생에게 차라리 기적 씨에게서 복권을 빼앗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오늘 복권이 없어진다고 한들 내일이면 기억하지 못할 기적 씨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간호사가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

"김 선생, 우리라고 왜 안 그러고 싶겠어. 저놈의 쓸모없는 복권, 당장이라도 불사르고 싶지. 하지만 원장님 특별 지시인 걸 어떡하겠어. 아, 나도 빨리 다른 층으로 교대 근무 가고 싶다."

확실히 기적 씨는 다른 환자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만큼 소란을 피우는 환자라면 병원 상담부서에서 진즉에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조치했을 텐데, 기적 씨에게는 유독 관대한 병원 조치가 이어졌다. 그 때문에 사고를 낸 운전자가 원장의 가까운 친인척이라던가, 기적 씨가 원장이 심혈을 기울이는 임상 논문의 주요한 대상이라던가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특히 후자의 소문이 신빙성 있었는데 원장의 회진 때마다 기적 씨는 꼭 면담하는 점, 기적 씨의 환자 기록의 양이 다른 치매 환자보다 몇 배가 되는 점 등이 근거였다. 이쯤 되니 원장이 자신의 연구실적을 위해 기적 씨를 이전 병원에서 지금의 병원으로 일부러 이송시켰다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돌았다. 결론적으로 기적 씨는 8층의 3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사람이었다.

오전 9시가 되자 병실에서 기적 씨가 데스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경쾌한 발걸음만 보고 있어도 나는 그가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여지없이 복권 한 장이 날아들고 나는 보답으로 그에게 당첨 사실을 알려줬다. 처음 하는 천사 역할은 썩 나쁘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기쁨의 오두방정을 떠는 한 인간을 실제로 보는 것은 진기한 체험이었다. 천사의 중요한 소임 중 하나는 그의 미래 계획을 듣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과거 기억 속의 미래였다. 치매 환자의 시간은 뒤죽박죽으로 흘렀다. 치매 환자의 기억장애 정도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는 예전 일은 잘 기억하는데 최근 일은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최근 기억 장애이었다. 기적 씨도 마찬가지로, 날마다 복권 당첨에 대한 기억은 잃어버리면서도 그의 과거 속 기억들은 꽤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기록은 매일 추가되어 국어사전만큼 두꺼웠지만 크게 3개의 시점으로 나눠 볼 수 있었다.

"엄마!"

기적 씨가 한 간호사에게 별안간 소리쳤다. 나는 듣는 순간 1번 시점임을 깨닫고 날짜를 찾아 어제 기록 뒤에 그의 말을 적기 시작했다. 그의 유년 시절이었다.

"엄마, 오늘도 빨래터로 일 다녀왔어요? 손이 남자 손처럼 우둘투둘하네. 이것 좀 보세요. 이제 우리 고생 끝났어요. 이 돈이면 번듯한 집도 살 수 있고, 더는 엄마 양잿물에 손 담그면서 온종일 빨래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 덕희도 공장 안 가도 되고, 덕환이 고등학교, 대학교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다고요."

기적 씨는 그 뒤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돈이 없어 구경만 했던 단팥빵, 사납금을 내지 못해 쫓겨난 학교, 병원비 때문에 각혈하는 여동생을 업고 집으로 오던 길의 풍경. 삶의 편린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야기의 끝에서 그는 울며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거친 손의 주름이 꼭 나무의 나이테 같았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왠지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전의 여운 탓인지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 식사하는 사이 나는 홀로 데스크를 지켰다. 오전에 기록했던 기적 씨의 기록에 오탈자가 없는지 다시 살펴봤다. 원장에게 바로 보고될 자료였다. 그의 기억을 읽을수록 아까 잡았던 거친 손의 감촉이 신경 쓰였다. 나는 내친김에 그의 다른 기록들도 읽었다. 2번 시점의 그는 40대 가장이었다.

"정희 엄마, 우리 이제 한시름 놓게 되었네그려. 이 돈이면 공장설비 증설하느라 쓴 은행 대출이며 사채 돈은 한방에 갚을 수 있겠어. 정희도 바이올린이든 뭐든 간에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라고 하고, 정수 이놈도 미국이든 호주든지 원하는 곳으로 유학 가라고 하면 되고 말이야. 우리도 남들처럼 여행이라는 것도 가자고. 당신이나 나나 비행기 한 번 못 타봤잖아. 이제 우리도 여유 좀 가지고 남들처럼 살자. 남들처럼."

3번 시점의 그는 50대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점 속의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화했다.

"강 사장,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내 맘 알지? 내가 강 사장이 자식이 셋이고 딸린 식구가 몇인지 왜 모르겠어? 내가 정말 물품 대금만 회수되면 빌린 돈에 이자 쳐서 두둑이 돌려주려고 했지. 그런데 이 망할 놈들이 진짜 깡그리 망해버려서 말이야. 강 사장, 그래도 걱정하지 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이거 봐봐, 이거! 내가 강 사장 돈, 한 방에 해결한다."

그날 이후 덕수는 천사 역할을 맡을 때마다 되도록 기적 씨의 말을 잘 들어주려 노력했다. 기적 씨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부모가 되기도 했고, 아들과 딸이 되기도 했으며 속죄를 받을 사람이 되기도 했다. 대화 속에서 복권은 여전히 유효했으며 이루지 못한 것들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

덕수가 하루 중 가장 긴장하는 순간에는 멘톨 향이 났다. 상쾌하다기보다는 무덤가의 이끼를 연상시키는 녹음의 냄새였다. 기적 씨의 기록을 살펴보는 원장의 왼팔이 움직일 때마다 매달린 황금 시계가 전등 빛에 번뜩했다. 얼마 전부터 원장은 직접 기적 씨를 면담하기 시작했다. 덕수는 그 모습을 보며 뭔가가 일어날 조짐이라 생각했다. 박 선생과 함께 기적 씨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례적인 건강 상태, 기분, 날씨 이야기가 지나가고 원장은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돌고 있던 신약 임상시험이었다.

"이전 임상시험에서 결과가 아주 좋았습니다. 빨리 퇴원하시고, 일상으로 돌아가셔야죠."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임상에 참여하시면 우리 병원재단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제가 직접 추천할 겁니다. 퇴원하시고 생활하시는데 전혀 문제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더 이상 바깥에서 험한 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제 말 알아들으셨죠?"

"나는…… 돌아갈 수가 없어."

원장은 지금 이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냐고 묻는 듯 8층의 3인을 쳐다봤다. 3인은 전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직원들이 문서작성 하는 것을 도와드릴 겁니다. 안되면 다른 곳으로 가셔야 해요. 다만 환경이 여기보다 좋지는 않을 겁니다. 이덕기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벗어나려다가 덕수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멈춰 섰다.

"자네는 근무하는 것 좀 어때? 8층 근무하는 게 힘들겠지만 조금 있으면 정규직 전환 시즌이니까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원장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검은색 볼펜을 덕수에게 넘기며 회의실을 나섰다. 덕수는 오른손에 볼펜을 꼬나 쥔 채 앉아있는 기적 씨에게 주저하며 다가갔다. 어깨 근처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자 기적 씨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김 선생, 나 안 할래. 이대로 살고 싶어."

덕수는 혀로 입술을 훑었다. 긴장한 탓인지 입술에 물기가 없었다.

"이제 복권도 그 기억들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쓸데없는…… 생각 안 하셔도 된다고요."

기적 씨는 대답 대신 긴 침묵을 택했다. 덕수는 그사이 책상 위의 동의서와 기적 씨의 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등학교에 막 올라간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고 기적 씨와 맞잡았던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울대에 힘을 주고 기적 씨에게 말했다. 좀 더 주저했다간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매주 수요일 점심에는 특식인 거 아시죠? 우리 서명하고 빨리 가서 먹어요."

덕수는 기적 씨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름을 썼다. 괴발개발 비명 같은 이름이 하얀 종이 위에 덩그러니 있었다.

*

원장은 기적 씨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임상 치료를 시작했다. 그에게 신약이 투입되고 8층의 3인 외에도 임상 연구에 필요한 인력들이 기적 씨를 주시했다. 더는 천사와 악마가 필요하지 않았다. 철저한 관찰과 기록이 있을 뿐이었다. 신약 투입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기적 씨의 치매 증상은 믿지 못할 정도로 호전되어 있었다. 날짜와 사건들을 혼동 없이 구분하기 시작했고 기억의 유실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환자가 치료되는 과정이자 삶이 다시 피어나는 과정으로서 그것은 축하받아야 마땅할 사건이었다.

그날 특식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쉽게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기적 씨의 손을 잡고 사인을 했던 기억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덕수를 괴롭혔다. 그것은 아무리 세탁해도 빠지지 않는 얼룩처럼 기적 씨를 볼 때마다 그를 주눅 들게 했다. 그 때문에 오직 자책감으로 기적 씨와 이어진 덕수만이 날 선 가슴으로 기적 씨를 위한 치료가 기괴한 삶의 연장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죽음과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죽음. 그렇기에 서서히 죽어갔지만, 어느 날 문득 발견하는 죽음. 냄새도 없고 벌레도 꼬이지 않지만 발견하면 이미 가지와 뿌리까지 드러내며 말라버린 흉측한 식물의 모습. 기적 씨를 볼 때마다 덕수는 이런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떨칠 수 없었다. 기적 씨는 아침에 데스크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오전 내내 침대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증세가 호전될수록 그의 피부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다음에 눈물이 말라갔다. 그리고 서서히 입술이 메말라 갈라졌다. 기적 씨가 퇴원할 즈음에서는 해 질 녘이 다 되어서야 느릿느릿 병원 옥상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복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황량한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퇴원하던 날 기적 씨가 데스크로 찾아왔다. 환자복이 아닌 낡은 회색 점퍼 차림에 검은색 등산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박 선생, 한 간호사와 차례차례 인사한 후 그가 덕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맑고 깊었으나 이전의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적 씨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점퍼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데스크 위로 올려놓았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복권이었다.

"이봐, 김 선생. 그동안 참 신세 많이 졌어. 이제 나한테 의미 없는 물건이니 자네가 처분해 주게."

"가지고 계시는 게 좋지 않으시겠어요?"

"아니야, 이걸 보고 있으면……별 잡생각만 들더라고."

복권을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그는 우리에게 손을 한번 흔들고는 사라졌다. 그것이 덕수가 본 기적 씨의 마지막이었다.

*

기적 씨가 사망 한 날, 덕수는 마침 이직 면접을 보던 중이었다. 경찰에서는 금전 기록도 조사했으나 의심할 만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 알리바이가 증명되자 형사는 그에게 기적 씨의 유서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유서라기보다는 메모에 가까웠다. 사랑요양병원, 김덕수 선생, 내 물건을 돌려주길 바람. 기적 씨와의 자초지종을 형사에게 설명하며 복권을 건네자 형사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흔 살이 넘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자연스럽지는 않아서요. 사연은 잘 알겠고, 이 건은 내사 종결하겠습니다."

형사의 말에 덕수는 잠시 숨이 턱 막혔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이덕기 씨 가족하고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고, 원래 유품은 가족에게 인계하는 게 맞는 데 이런 경우에는 가지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기적 씨, 아니 이덕기 씨 장례는 어떻게 되나요?"

"경찰에서 가족에게 계속 연락을 취해 보긴 할 겁니다만, 연락이 안 되거나 시신 인수를 거부할 때는 무연고자로 장례처리가 될 겁니다."

"만약 가족을 찾게 되시면 제 연락처로 전화 부탁드립니다."



보름이 지난 후 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적 씨는 끝내 가족을 찾지 못했다. 형사는 내일 그의 시신이 화장터로 이동되며 시에서 주관하는 공영장례 후 화장될 것이라 설명했다. 다음날 덕수는 형사가 알려준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은 소박하고 조용했다. 영정사진을 대신해 무연고자라고 쓰인 흰색 종이 밑으로 그의 이름이 적힌 위패만 덜렁 서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듯 상에 놓인 향로는 깨끗했다. 시계를 보니 2시간 후면 기적 씨의 관은 화장터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덕수는 향을 한 개비 집어 불을 붙인 후 향로에 꽂았다. 길고 흰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향이 하나 다 타도록 그와의 일을 추억하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기적 씨, 이거 돌려드릴게요."

덕수는 품에서 복권을 꺼내 돌돌 말아 향로에 꽂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와 불꽃이 크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담배를 피운 것처럼 희고 빽빽한 연기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연기는 주인을 찾아가듯 그의 위패를 한 바퀴 돌아 천천히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는 마지막 연기가 사라지는 것을 본 후 뒤로 돌아섰다.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며 기적 씨의 위패에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

덕수는 소주 한 병을 추가했다. 이미 그의 테이블 밑에는 빈 소주병 3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주문받은 직원은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새까맣게 탄 고기를 불판 가장자리로 옮겼다. 얼마 줄지 않은 고기와 덕수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후 직원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안주도 드시면서 술 잡수세요, 라고 말했다. 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를 계속 따랐다. 몇 잔 연거푸 더 마신 뒤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바라봤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길거리 네온사인의 불빛이 소주잔 위로 영롱하게 일렁였다. 덕수는 주머니들을 차례로 더듬으며 휴대전화를 찾았다. 한참을 찾다 결국 테이블 위에서 발견한 후 전화를 걸었다.



[미영이, 내 동생! 공부 잘하고 있어?]

[오빠, 술 마셨구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무 일 없어.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있잖아, 미영아, 오빠가 요양보호사 왜 했는지 아냐?]

[나…… 오빠가 정말 고생하는 것 알아. 고마워 오빠.]

[아니야, 아니야 인마,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한 말 아니야. 너는 그런 말 하지 마.]

덕수는 눈가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말했다. 동시에 동생이 자신과 같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너, 엄마 얼굴 기억해?]

[……]

[나는 이제 도통 기억나질 않아. 너는 아기 때라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 엄마가 서울 간다고 했었거든, 그래서 이거 하면 혹시 늙었더라도 서울 간 엄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미영아, 우리 엄마 잘 있겠지, 잘 있을 거야. 그렇지?]

덕수는 그 후로도 한참을 이야기했다. 대꾸하는 동생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지만, 그는 통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계속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하고 또 말하고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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