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어딘가의 언어로 만들어진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무게일까.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지우려는 망각의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이 찾아왔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감독 바딤 비얼먼은 독일 작가의 원작인 단편 소설 '언어의 발명'을 바탕으로 또 한 편의 인상적인 홀로코스트 영화를 만들어냈고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참사의 비극이 일상이 되어버린 국내 관객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2차 세계대전 중 운명적으로 맞닥뜨린 두 사람의 이야기다. 동생이 머무르는 테헤란으로 가기 위해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원하는 독일군 장교 '코흐'와 살아남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유대인 '질' 사이에 시작된 '가짜 페르시아어 수업'이 영화 내내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진행된다. 말 그대로 '언어를 발명'해가며 필사적으로 가짜 페르시아어를 암기하는 유대인 질과 질이 만들어낸 단어들을 곱씹어가며 외워가는 독일인 코흐는 각기 다른 삶의 목표를 위해 기이한 연대를 만들어간다. 생존을 위한 질의 노력과 포로수용소에서 흘러가는 덧없는 시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두께를 만들어내고 질이 발명한 가짜 페르시아어는 적어도 질과 코흐 사이에서는 진짜 소통이 가능한 말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코흐는 급기야 거짓말을 한 포로 질이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택한 질과 그 거짓말로 새로운 삶을 꿈꾸는 고흐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이어간다. 자신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포로인 질이 만들어낸 언어로 이야기하는 코흐의 모습은 아이러니하지만 '가짜 언어'이기에 가능한 고백이기도 하다. 질 또한 자신이 발명한 언어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각인돼 간다. 생존의 언어는 모국어 이상으로 질에게 익숙해지고 정신을 잃고 신음하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터져 나오듯 가짜 언어로 엄마를 부르는 질의 모습은 코흐에게 그리고 보는 이들의 마음에 아프게 박힌다. 언어란 무엇일까, 언어를 통한 소통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언어로 가능한 것인가를 '페르시아어 수업'은 질과 코흐의 변화를 통해 진지하게 묻는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 관객의 마음에 깊은 포문을 남기는 엔딩을 준비해두고 있다. 마치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룬 휴머니즘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했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뭉근하게 뜨거워지던 관객의 감정을 얼얼하게 만드는 실화의 온도를 느끼게 한다. 언어를 통한 한 남자의 생존과 두 사람의 말 사이에 피어난 연민과 공감을 넘어 과연 타인의 비극 앞에서도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게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의 엔딩은 개인이 발명한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처럼 느껴진다. 페르시아어에 문외한이던 질이 만들어낸 가짜 페르시아어는 사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들의 명단으로부터 시작됐다. 한 사람의 이름에서 시작된 단어들의 숫자가 2840개가 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 단어들을 외워낸 질은 그들의 이름을 세포처럼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불태워 존재를 지우고자 하는 폭력의 행위 뒤에도 그들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생존자 질의 입을 통해 한 단어에서 한 사람의 이름으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가짜로 만들어낸 단어들이 진짜의 이름들로 다시 살아날 때, 영화는 작은 불씨가 만들어낸 거대하고 선명한 애도의 순간을 기록해 낸다.
오만한 침묵을 뚫고 나오는 메마른 비명, 어둠을 비집고 나오는 가느다란 빛, 존재를 지우려는 사람들과 지워질 수 없는 존재들. '페르시아어 수업'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배움이 필요한지를 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