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당신 얼굴 앞에서

[영화觀] 당신 얼굴 앞에서
  • 입력 : 2023. 01.27(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정이'.

[한라일보] 누군가의 얼굴은 어떻게 각인되고 그 각인은 얼마나 지속될까. 수없이 많은 닮은꼴들 사이에서 유일한 단 하나를 잊는 일에는 얼마큼의 기간이 필요할까. 19금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천만 관객을 열광시킨 좀비 블럭버스터 '부산행' 그리고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을 만든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신작 영화 '정이'는 SF 장르라는 외피를 뚫고 나오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생생한 캐릭터들과 상상력을 구체화한 놀라운 비주얼로 호평을 받았던 그의 신작은 흥미롭게도 전작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다. 연상호의 전작들은 가까운 관계에서 출발해 속도감을 더해가며 공간을 넓혀가는 확장의 쾌감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킨 바 있다. 보는 이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림들이 화면 안에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놓여지는 연상호의 스타일은 애니메이션에서 출발한 그의 테크닉이 가장 유려하게 표현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늘 뜨겁고 바빴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재난 상황들에 맞닥뜨린 채 감정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려야 하는 서사 구조 안에서 앙상블 캐스팅의 배우들은 치고 빠지는 식으로 퍼즐을 맞춰왔다. 연상호의 작품들에서 배우 한두 명의 얼굴보다는 배우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유기적 결합은 연상호 세계를 구성하는 흥미로운 방식이었고 전작인 시리즈물 '지옥'에서는 완성도 높게 구현된 바 있다.

 하지만 '정이'는 다르다. '정이' 속 인물들은 서로의 앞에서 오랜 시간 침묵을 유지한 채 머문다. 달리 말하자면 쉽게 누군가를, 어딘가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정이' 안에 있다.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 그곳에서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A.I를 개발하는 크로노이드 연구소라는 공간. 다분히 장르적인 설정이지만 '정이'는 이 연구소 안으로 들어온 뒤 쉽사리 밖을 향하지 않는다. 인상적인 첫 액션 시퀀스 역시 공간의 밀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다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인상적인 비주얼은 서늘한 풍경화처럼 인물을 둘러싼다. '정이'는 SF장르 특유의 금속성과 함께 녹이 스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질감의 작품이기도 한데 군데군데 의도적으로 낡고 오래된 미래라는 '부식의 징표'들을 새겨 놓았다. '정이'는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연상호의 본격 SF 장르물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다소 의아하게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코 스케일이 작지도 않고 진일보한 컴퓨터 그래픽은 놀라울 정도인데 이 영화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복제한 전투 용병 A.I '정이'의 얼굴을 매일 봐야 하는 딸 서현.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기억 속에 완벽하게 엄마로 각인된 가짜의 모습과 음성을 마주해야 하는 그는 악화되고 약화되는 인간이다. 사라지지 않았지만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엄마와 망가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엄마의 형상, 그리고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버텨내는 딸. '정이'는 이 기이한 소멸을 감당하는 일과 애도를 유예하는 일이 마치 끝나지 않는 내전과도 같다고 말한다. 마음속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도 더 일어나는 전쟁과도 같은 감정은 사랑을 닮았으나 반드시 사랑이라고 만은 할 수는 없고 내 앞에 누군가는 사람을 닮았지만 분명히 당신이라고 호명할 수 없는 망설임들이 '정이' 속에 일렁인다.

 이 지체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더욱 구체화하는 것은 배우 강수연과 김현주의 얼굴과 몸짓, 표정과 음성이다. 각각 다른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과도 같은 두 배우는 그들이 쌓아온 시간들을 정이와 서현을 통해 포개어 놓는다. 두 배우의 중첩은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다른 각도로 보이는데 배우가 가진 무게감이 때로는 극 중 인물을 누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10년 만에 '정이'로 복귀한 강수연과 전작 '지옥'을 통해 기존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연기를 선보인 바 있는 김현주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SF 장르물 '정이'를 무대 위의 2인극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정이'의 다른 요소들이 테크니컬하게 구현되었다면 배우의 연기는 오히려 감정적인 호소력이 극대화된 쪽이다. 연상호 감독의 캐스팅은 특히 두 배우의 역사를 알고 있는 국내 관객들에게는 더욱 드라마틱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정이'는 '연니버스'라고도 불리는 연상호의 작품 세계 중 가장 진일보한 기술로 구현된 놀라울 만큼 미니멀한 멜러 드라마다. 기대한 재미는 없을 수 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무수한 질문지를 받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정이'는 누군가의 해석이나 분석보다는 영화를 본 관객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흥미로운 SF영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31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