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아직 고등학생이다. 졸업 전이고 실습을 나왔다. 콜센터이지만 대기업이라고, 좋은 취직 자리라는 말에 들뜬다.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치는 흉내를 내며 활짝 웃는다. 소희의 처음은 그랬다. 어떤 일이든 벌어질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힘들어도 이겨낼 거라고 마음을 먹었다. 춤을 추다 여러 차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모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와의 싸움을 한다는 건 소희에게 기꺼운 일이었다. 땀을 흘리고, 자주 실패해도 스스로를 마주 볼 수 있던 그런 사람이 일터에 발을 들인 뒤 자살했다. 아직 고등학생이다.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19살, 사회의 문턱을 갓 넘은 10대 여성에게 벌어진 예정된 비극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걸쳐 콜센터 실습생 김소희의 몇 달간의 여정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진다. 술집에서 편견으로 가득한 비겁한 비아냥에 정면 승부를 하던 소희는 회사라는 시스템 안으로 들어선 뒤 점차 자신을 잃어간다. 소희의 성격이, 태도가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가 처음 겪는 더러운 세상이 너무나도 견고하기 때문이다. 숫자와 그래프로 서열을 매기는 건 취업률에 전전긍긍하는 학교도 마찬가지였지만 개인의 수고와 노동에 값을 치러야 하는 회사는 더욱 악랄하게 표정을 숨기는 곳이다. 그곳에선 기본을 지킨다는 것은 오직 실적과 관련된 말일뿐이다. 그렇게 거대한 시스템을 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는 일들이 매일 일어난다. 욕설과 비난 사이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생기지만 사람이 들고 나는 일의 부피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런 지옥에서 나의 존재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애써 지워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이미 겪었을, 숙련된 하나의 부품으로, 어떤 고유의 빛깔도 내지 못하기 위한 훈련이 가속화된다. 소희 또한 이 일이, 자신이 속한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했던 일도 아니고 선택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행운처럼 주어진 일이고 한 명의 개인이 전체에 피해를 줄 수 다는 압박 아래서 소희는 처음과는 다른 곳을 향한다. 다른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채로. 숫자와 그래프만 보고 생존하기를 택한 소희는 단순해진다. 일한 만큼 돈을 벌기로.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한 만큼만 돌려받을 수 있었다면, 소희의 정직한 계산대로 그녀에게 주어지기만 했다면 아마도 소희는 처음을 잊지 않고 다음으로 내딛을 수 있었을 텐데.
사회 고발 드라마인 동시에 성장 드라마인 '다음 소희'는 소희와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형사 유진의 이야기를 반으로 쪼개 하나로 만든다. 140분여에 이르는 상영 시간 동안 영화는 꼼꼼하고 촘촘하게 비극의 앞과 뒤를, 옆과 속을 살핀다. 한 개인의 죽음이 비롯된 악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악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처럼 영화는 비장하고 성실하다. 허투루 만들어진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저 혀를 차는 한숨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유했던 소녀의 비극에서 그치지 않기 위해 영화는 형사 유진의 몸과 마음을 빌어 할 수 있는 모든 단서를 쥐고자 한다.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뜨겁고 차가웠던 마음의 온도들이 여실히 전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분노와 안타까움, 체념과 신념이 뒤엉킨 상태에서 이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집요했을 손과 눈의 움직임이 영화 곳곳에서 읽힌다. 다음의 소희가 없기를 바라는 간곡함과 소희의 다음을 만들고자 하는 절실함이 제목에도 어려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성적표가 아닌 월급명세서를 받아들일 때 그 숫자의 무게는 다를 것이다. 나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경제 활동을 시작한 이들에게 우리는 왜 그 돈의 귀중함을, 그 돈을 버는 일의 위대함을 가르쳐 주지 않을까. 많은 작품들에서 클리셰처럼 쓰였던 첫 월급을 받은 사람의 작은 기쁨조차 '다음 소희'에는 없다. 그건 이제 더 이상 감격적인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 유진은 소희의 친구이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착취당하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태준에게 말한다. '욱 할 때가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나에게, 경찰에게 말해도 된다고.' 이 직접적인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 아니라고, 다들 이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다는 영화가 마치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누가 감히 세상은 원래 이렇게 더럽고 인생은 누구나 서럽다고 자조할 수 있을까. 건물주가 조물주라는 농담이 만든 이 시대의 미친 환영 속에서, 일그러져 가는 무수한 가치 앞에서 우리는 그 낙담과 분노에 마저 값을 매기고 순위로 줄 세울 것인가. '다음 소희'는 뜨거운 분노를 응축해 만든 묵직한 단도 같은 영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