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굼부리의 어두음‘산’은 山이 아니다
[한라일보] "탐라순력도에 '산구음부리악(山仇音夫里岳)', 제주삼읍도총지도와 제주삼읍전도에 '산구음부리(山九音浮里)', 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에 '산굴(山窟)', '조선지지자료'에 '산굼모리'로 표기했다. '굼부리'는 분화구에 대응하는 제주어로 '산 정상에 우묵하게 파인 곳'을 말한다." 산굼부리의 지명유래를 설명하는 어느 책의 내용이다. 산굼부리의 '산'은 산(山)이므로 굳이 설명하지 않고, 굼부리만 추가로 설명한 것이다.
또 어떤 자료에는 산(山)은 '산'의 음독자 표기라고 설명했다. '산구음부리악(山仇音夫里岳)'처럼 한자로 쓰여 있는 이 '산'이 산(山)을 뜻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글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위의 책과 같은 입장이다. 산(山)이란 한자 말인데 그렇다면 당시 제주도 고대인들은 한자어를 쓰는 집단이었다는 것인가? 만약 산굼부리라는 말을 처음 썼던 집단이 한자어 권 사람이 아니라면 당시 사람들에게 산(山)이란 외래어 혹은 외국어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가 산을 '마운틴'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과연 한자로 된 외래어인 산(山)을 사용했을까? 그렇다면 왜 굼부리산이라 하지 않고 산굼부리라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하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산굼부리라는 명칭에서 의문이 드는 부분 첫째는 이것이다.
일본 규슈 아소산 분화구. 위키미디어 커먼즈 제공
‘산’이란 형용사로 ‘아래로’
‘내리막의’ ‘깊은’의 뜻
이 '산'의 정체는 무엇인가? 산이라는 말이 뒤에 붙는 지명은 많다. 백두산, 한라산처럼 산(山)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 국어에서 이 말은 부지기수로 사용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뫼 산'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런데 제주어에서 '산'은 산굼부리처럼 가끔 앞에 붙는 경우가 있다. 산지(항), 산지(마을), 산작지왓(선작지왓), 곳곳에 산이동산이 있다. 그 외로도 오름 이름에도 간간이 나오고 여타의 지명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말의 뜻을 모르고는 도저히 그 지명의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이름들이다.
우선 사전상의 의미를 찾아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형용사로 '아래로', '내리막의'의 뜻이다. '깊은'의 뜻도 있다. 여기서 '하구(강의 입구)' 같은 뜻을 갖는 말로도 파생했다. 앞으로 이 부분은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강의 입구라는 뜻으로 파생한 말은 산게(sange)다. 이게 점차 '산저'를 거쳐 '산지'까지 변했을 것이다. 아이누어다. 아마 산굼부리에 처음 도착했던 사람들은 아이누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그들 자신이 아이누거나 아이누어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야, 엄청나게 깊다!'라는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화산활동 중인 아소산 외륜의 나카다케 분화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제공
제주어 이외에도 이런 뜻으로 '산'을 쓰는 사례가 있을까? 底(저)라는 글자는 '밑 저'라 한다. 밑바닥이라는 뜻이다. 일본어로는 '소고(そこ)'라고 발음한다. 그 뜻은 바닥, 밑, 창의 뜻이다. 이 단어는 소(そ)+고(こ)의 구조다. '소'는 가장 아래, 본질, 기초의 뜻이고, '고'는 곳(處)이다. 이 '소'와 '산'이 무슨 관계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소'는 'ᄉᆞ'가 고어형으로 언어가 변천하면서 '소' 혹은 '사' 아니면 그 중간 정도의 발음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어에서는 'ᄉᆞ'에 관형격 어미 ㄴ이 붙어 'ᄉᆞᆫ'이 되고 이것이 현대어에서 '산'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뫼'와는 거리가 멀다. 아이누어에서 'ᄉᆞ'는 명사로 분화구를 의미한다.
'산' 아이누어 기원의 제주어
전엔 어린이들이 많이 갔던 곳의 하나가 계곡이다. 뙤약볕에 옷을 홀랑 다 벗고 물장난을 치고 있으면 먼저 밖으로 나갔거나 이제 들어오는 형들이 짓궂은 장난을 한다. '야~ 산내첨져~~, 산내쳠져~~'하고 외친다. 그럼 누구랄 것도 없이 가려야 할 것도 챙기지 못한 채 후다닥 물 밖으로 나온다. 이 산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라산에 큰비가 와서 흘러 내려오는 냇물'이라고 풀이한 사전이 있다. 맞는 풀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산내의 원인은 될지언정 산내 그 자체 풀이는 아니다. 원래 산내란 내리막 경사를 빠르게 내려오는 급류를 의미한다. 그러니 아주 빨리 나와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
서귀포시 상효동에 산냇도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5·16도로가 지나는 큰 다리가 놓여 있다. 이 계곡은 효돈천계곡인데 여기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돈내코가 나온다. 이 다리가 있는 지점을 산냇도라 한다. 이 산냇도란 '내리막 경사가 급한 계곡 입구'라는 뜻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산이마을이 있다. 이 지명 역시 '내리막 경사에 있는 마을'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제주도에는 국어사전이나 제주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산'이라는 말이 아직도 살아있다. 아이누어 기원의 제주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일본 규슈 중앙부에 아소산(阿蘇山)이라는 활화산이 있다. 직경이 최대 25㎞, 둘레가 100㎞가 넘는 세계최대의 칼데라 중 하나다. 이 아소산이라는 이름은 아+소의 구조다. 여기서 '아'는 '화산으로 만들어진'이라는 뜻이다. '소'는 여기서 말하는 'ᄉᆞ'가 변한 '산'에 해당한다.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저지(분화구)'라는 뜻이다.
일본 고어에 소고(そこ)가 있다. 위에 든 예와 같은 어형이지만 그 뜻은 다르다. 땅바닥 혹은 물밑이라는 뜻으로 쓴 용례가 있다. 바닥에 닿는 곳, 심오한 곳, 마음속 깊은 곳으로 쓴 사례도 있다. 이런 용례로 보아 '산'이란 '깊은'이라는 뜻으로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고어에는 이와 관련한 말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예컨대 '쌀 가격이 저가(底價)에 달했다'라는 말은 '쌀가격이 바닥을 쳤다'라는 표현이다. 하늘에 대한 대지를 표현하기도 하고 땅속 깊은 곳을 지칭하기도 한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