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굼부리와 선작지왓의 '산'과 '선'은 공통기원
[한라일보] 한라산에는 선작지왓이라는 곳이 있다. 대체로 붉은오름, 윗세오름, 윗세족은오름 3개 오름을 연결하는 선에서 동~남쪽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칭한다. 한라산 총서에는 이 일대를 '선작지왓'이라고 하면서 "붉은오름에서 솟아 나온 용암이 서남쪽으로 흘러내려서 바위군을 형성한 것을 이르는 제주방언"이라고 규정했다. 선작지왓의 '선'은 '서'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붙은 말이라고 했다. '작지'는 자갈 또는 자갈과 같은 많은 돌이 널려 있다는 데서 붙인 것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이것은 '작지'는 자갈의 제주어로 본다는 입장이다. 밧은 밭의 제주방언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선작지왓이라는 지명은 자갈 또는 돌덩어리, 바윗덩어리 따위가 넓게 서 있는 밭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한라산의 지명이라는 책에는 설명이 다르다. 여기엔 산작지ᄆᆞ르와 산작지왓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산작지ᄆᆞ르는 붉은오름에서 남서쪽 해발 1600m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서호동과 호근동 사람들은 이 일대의 남쪽 1550m 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산작지왓의 북쪽 붉은오름으로 오르는 언덕을 산작지ᄆᆞ르 혹은 산작지마루라 한다는 것이다. 산작지왓은 이보다 낮은 해발 1500~1590m 사이 남북으로 약 600m 범위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돌이 많은 곳으로서 산에 있는 자갈밭 또는 산에 있는 작지밭이란 뜻으로 지역에 따라 달리 불러왔다고 했다.
그러나 인근 마을에서 흰작지왓, 흰자갈밧, 신작지왓, 선작지왓으로 채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선작지왓'은 이 지역 발음을 누군가 잘못 옮긴 것으로 추정했다. 지역에서는 흰작지왓이라는 뜻으로 신작지왓이라 하는 것이 잘못 전달된 결과 선작지왓으로 됐을 거란 취지다.
한라산 선작지왓.(2001년 촬영)
선작지왓의 '작지'는 돌궐어 기원의 '슬로프'
어느 한쪽은 선작지왓이라 하면서 자갈 또는 돌덩어리, 바윗덩어리 따위가 넓게 서 있는 밭이라 한다. 자갈만이 아니라 돌덩어리와 바윗덩어리도 작지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것일까도 의문이다. 또 한쪽은 산작지ᄆᆞ르와 산작지왓으로 구분하면서 산작지왓 혹은 선작지왓은 흰 돌이 많은 곳으로 흰작지를 의미하는 신작지로 부르던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이질적인 설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곳의 자갈이나 돌들은 정말 서 있는 것인가? '흰'이라는 발음이 '신'이 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선'이나 '산'으로 잘못 전달될 수 있는가? 왜 누구는 같은 돌을 보고 '서 있는 돌'이라 하고 누구는 '흰 돌'이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봉착하면 설명이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런 의문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선' 혹은 '산'은 시대에 따라서나 집단에 따라서도 고정된 발음인가? 만약 'ᄉᆞᆫ'이라면 '산'이나 '선'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작지'라는 말은 '자갈'이거나 '돌'일까? 다른 뜻은 없을까? 작지를 왜 자갈이라고 단정했을까?
'선' 혹은 '산'으로 표기되는 이 말은 아이누어 기원의 'ᄉᆞᆫ'이 변한 발음이다. '아래로', '내리막의'의 뜻이다. '작지'의 뜻을 알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작지란 얼핏 오늘날의 자갈을 뜻하는 제주어와 음상이 같으므로 자갈로 보기 쉽다. 그러나 이 말도 오늘날의 말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써 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원시 투르크어 공통어원에 '됄'이 있다. 이 말은 산비탈 혹은 경사면을 뜻한다. 요즘 말로 슬로프를 말한다. 투르크어에서 '됮' 혹은 '됒즈', 아제르바이잔어에서도 거의 같은 발음으로 나타난다. 같은 투르크어권의 우즈베키스탄어에서는 '투즈'로 파생했지만 위구르어, 키르기스스탄어에서 '퇫즈', 노가이어와 카카스에 '퇫스', 투바키어 '돼즈'로 파생했다. 작지란 바로 이 말과 공통 기원한 말이다. 투르크어 '됏즈'가 구개음화 하면서 '좩즈'를 거쳐 오늘날의 발음 작지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산작지란 아이누어를 쓰는 집단이 '내리막 경사의'의 뜻으로 'ᄉᆞᆫ'이라 하던 것을 돌궐계의 집단이 들어오면서 슬로프의 뜻을 추가하여 'ᄉᆞᆫ작지'라 불렀을 것이다. '내리막 경사지'라는 뜻이다.
산갈치의 일종 리갈레쿠스 글레스네.(2012년 멕시코에서 촬영, 위키 커먼스 제공)
산갈치란 산에 올라가는 갈치?
한라산 어승생오름에는 섯산이물과 동산이물이라는 곳이 있다. 서쪽 사면 물, 동쪽 사면 물이라는 뜻이다. 이 오름의 경사면에 이용할만한 물이 두 군데 나는데, 이들을 방위로 구분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처럼 한라산 곳곳에 '산-'이 붙은 지명들을 볼 수 있다.
국어 '작은 돌멩이들'을 지시하는 '자갈' 혹은 제주어 '작지'는 '내리막'을 뜻하는 제주어 '작지'와 달리 퉁구스어 '자갈'과 공통 기원이다. 퉁구스어권의 만주어 자카라 혹은 자카리, 나나이어 자갈로 나타난다.
한라산 선작지왓.(2001년 촬영)
산굼부리의 '산'이 갖는 사전적 의미와 제주어에 남아 있는 예를 제시했다. 그중 '깊은'의 뜻을 갖는 예가 또 있다. 산갈치라는 어종이다. 이 동물은 모양도 비슷하고 이름에 갈치라는 말이 들어있어서 갈치와 근연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갈치는 농어목 갈치과에 속하는 데 비해 산갈치는 이악어목 산갈치과에 속하여 분류학적으로 거리가 멀다.
갈치는 보통 수심 300m 이내 표층에 서식하지만, 산갈치는 1000m 정도 깊은 심해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닷속에 사는 갈치가 엄청나게 오래 묵어 산으로 가면 산칼치란 요물 혹은 요괴가 되는데, 이 요물이 지나가는 곳마다 초목이 마르고 그 근방에 가뭄이 일어난다는 전승이 있다. 사실 이건 산갈치라는 이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 산갈치의 '산'이란 산굼부리에서 보는 산과 같은 의미로 '깊은'의 뜻이다. '심해에 사는 갈치'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