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46] 3부 오름-(5) 산굼부리 ‘깊은 굼이 있는 봉우리’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46] 3부 오름-(5) 산굼부리 ‘깊은 굼이 있는 봉우리’
산굼부리의 ‘부리’는 제주어에만 있는 봉우리의 뜻
  • 입력 : 2023. 07.04(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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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삼각봉은 ‘세(쇠)’에
부리가 덧붙은 '세부리'


[한라일보] 경기도 강화의 고구려 때 이름은 고목근현(高木根縣)인데 여기서 근(根)자가 부리를 훈차한 것이다. 지금은 根(근)이라는 한자의 뜻을 '뿌리'라 하지만 오랜 옛날에는 '부리'라 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목군현 일운 달을참(高木根縣 一云 達乙斬)으로 나오는데, 여기서

한라산의 삼각봉. 사진=산악인 김경미 제공

근(根)은 참(斬)에 대응한다. 참(斬)이나 근(根)은 모두 중세어가 '불휘'다. 따라서 고목근(高木根)은 산봉우리 혹은 높은 봉우리를 뜻하는 '달부리' 정도로 읽힌다.

부리는 훗날 어말 모음 탈락과 경음화 현상을 겪으면서 부리, 뿌리, 뿔로 변화했다. 이런 부리형 산 이름은 서울의 삼각산(三角山)을 비롯하여 전국에 산재한다. 삼각산이란 원래 쇠뿔 또는 세뿔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한라산 삼각봉도 같은 뜻이다. 삼각봉(三角峯)이란 한자 말인데 한자란 한참 후에 들어왔으므로 고대인은 이런 이름을 사용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 봉우리도 '세부리' 혹은 '쇠뿔이' 정도로 불렀을 것이다.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오늘날의 삼각봉이 되었다. 이같이 부리라는 말에는 '산부리'라는 뜻이 있다.

일본에도 근(根)이 붙는 산 이름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하코네산(箱根山)이다. 하코네의 '네(根)'는 '산'을 말한다. 이 지역 고대인들은 우리와 같이 부리로 불렀던 것임을 암시한다.



부리란 부락의 벌(부리)·새 주둥이
뿌리·(봉)우리의 동음이의어



새나 일부 짐승의 주둥이를 지시하는 부리라는 말은 평야나 평원을 가리키는 부리와 어원이 다르다. 알타이제어의 공통어원으로 '부로'가 부리 혹은 코를 지시한다. 돌궐어권의 어원으로 '부룬' 혹은 '부른'에 대응한다. 돌궐어권 여러 언어에서 코, 앞부분, 앞을 지시하는 말로 파생했다. 이 말은 우리말 부리, 일본어 입술 혹은 부리를 지시하는 '구치비루'에 대응한다. 이즈반도에는 이카이카네(根), 우네(宇根)처럼 근(根)이 붙는 지명이 여럿 있다. 부리처럼 돌출했다.

이즈반도 해안 이카이카根, 네(根)가 붙는 지명이 여럿 있다. 부리처럼 돌출했다.

따라서 발음은 똑같이 '부리'이지만 묏부리라고 할 때와 새나 일부 짐승의 주둥이를 지시하는 부리는 어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산굼부리에 들어있는 '부리'가 부리같이 돌출했다는 뜻에서 썼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산굼부리가 특별히 돌출했다고 할만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뜻에서 썼을까? 알타이제어의 공통어원으로 '풀리'가 뿌리 혹은 토대, 기반, 기초를 지시한다. 특히 퉁구스어권에서 우리말과 유사한 음상을 보인다. 퉁구스어 '풀레'가 뿌리를 나타낸다. 만주어 '플렉세, 남만주어 '플럭서' 혹은 '플룩수'가 있다. 일본어에선 '푸'가 산의 기반, 기초 등을 표현한다. 이 말은 우리말의 '불휘'에 대응한다. 산굼부리의 부리가 경음화하면 뿌리라는 발음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 지명에서 높은 부리라는 뜻의 달을참(達乙斬)을 고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여 부리를 근(根)이라는 한자로 대신 쓴 사례가 있다. 그러므로 뿌리 혹은 토대, 기반, 기초를 지시하는 어원, 그중에서도 퉁구스어 '풀레'와 어원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뿌리는 전체에서 어느 부분을 가리키므로 그 윗부분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손톱의 뿌리나 발톱의 뿌리는 손톱과 발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새의 살갗에 박힌 깃털의 부분을 깃뿌리라고 하는데, 이 경우도 개념상 깃털이라는 부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산굼부리의 부리가 전체 지형 중의 일부분을 한정하여 지시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뿌리나 토대 같은 말과 어원을 공유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부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원퉁구스어 어원으로 '포란'이 있다. 이 말은 산봉우리, 다발이나 무더기, 앞머리 또는 (말의) 앞 갈기를 뜻한다. 퉁구스어권의 에벤키어에 '호론'은 산봉우리, 네기달어 '호요', 남만주어 '호런' 혹은 '호룬', 올차어 '포로', 오로크어 '포로', 나나이어 '포롱' 등이 모두 봉우리를 뜻한다. 오로촌어 '홍'은 윗부분, 우데게어 '홍'이 위, 솔롱고어 '오로'가 산길, 만주어 '호론'이 다발 혹은 무더기를 지시한다. 원퉁구스어 '포란'이 '포로', '포론' 등으로 파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사실 돌궐어에서는 '오르'를 공통어원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말은 오르다 혹은 위의 뜻을 갖는다. 고위구르어, 돌궐어, 투르크메니스탄어, 중세돌궐어 등 수많은 언어에서 '오르'나 '우르' 등으로 나타난다.



봉우리는 퉁구스어권의 봉과
돌궐어권의 오리가 결합한 말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또한, 야쿠트어 '위르트'는 윗부분을 의미한다. 돌간어 '왜래트', '왜투'는 옆, '왜래테'는 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퉁구스어에서는 '포론' 혹은 '포로-'로 파생하여 결국 '포로', '포로이'로 변화를 겪으면서 점차 '봉'으로 수렴하고, 이 말은 결국 봉(峰)으로 굳어진다. 돌궐어권에서는 '오르', '왜르', '위르' 등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오르' 혹은 '오리'로 수렴함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봉우리는 이런 퉁구스어권의 봉과 돌궐어권의 오르, 우르가 결합한 말이다.

산굼부리의 부리는 평야나 평원 아니면 부락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 아니다. 새나 일부 짐승의 주둥이를 지시하는 부리같이 돌출한 곳이라는 뜻으로 쓴 것도 아니다. 뿌리나 토대, 기초 같은 말과 어원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봉우리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이 '부리'는 제주어에만 남아 있는 봉우리의 고대어이다. 제주 지명에 깊이 묻힌 화석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산굼부리의 어원상의 의미는 깊은 굼이 있는 봉우리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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