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04] 3부 오름-(63) 불룩하게 솟은 물이 있는 '보르미'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04] 3부 오름-(63) 불룩하게 솟은 물이 있는 '보르미'
하논이 큰 논이라면 논농사를 짓기 전에는 뭐라 했나?
  • 입력 : 2024. 11.12(화) 03: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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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에서 논농사를 지은 것은 언제부터인가?


[한라일보] 화산이 폭발하면 분화구가 생긴다. 이 분화구에 물이 고이면 호소가 되고, 만들어지는 원인에 따라 화구호, 칼데라호, 마르호 등으로 구분한다. 그중 화구호는 비교적 작고 동그란 형태를 하고 있다. 화구의 안쪽 벽은 급경사이지만 중앙부는 평탄하다. 백록담이 대표적이다. 칼데라호는 화산체가 형성된 뒤 대폭발이나 화산의 중심 부분이 함몰되어 만들어지는 호수다. 백두산 천지가 대표적이다.

가운데 불룩하게 솟아오른 오름이 '보르미'다. 이 물은 말망수라는 샘이다.

마르는 화산활동 초기, 단시간의 폭발적 분출 작용으로 생기는데 폭발 시 분출물이 날아올라 화구 주변에 퇴적되어 수많은 작은 언덕을 형성한다. 삼매봉에서 보면 한라산을 병풍 삼아 서귀포의 바다 가까운 곳에 타원형의 아늑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평탄지가 보인다. 여기가 하논마르이다. 약 3만년 전에 만들어진 마르형 화산으로 최대 직경 1150미터, 깊이 90미터로 제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분화구다. 이 마르호는 서귀포 시내에 있다. 만약 이 화구호를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다면 서귀포의 중요한 환경 자산이 될 것이다. 이 화구 내를 하논이라 부른다. 서홍동 역사문화지에는 하논이란 넓은 논, 큰 논이란 뜻인 '한 논'에서 유래한 명칭이라 설명했다. 옛 지도에 대답(大畓)이라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논 논농사의 역사는 대략 500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논 논농사 역사는 매우 단편적이고, 전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과연 '하논'이란 큰 논이란 뜻인가? 만약 500년 전 논농사를 지었다는 전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 전에는 무엇이라 했을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그리고 작은 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때라야 큰 논이라는 지명도 생긴다. 이런 점에서 하논이 '큰 논'이란 해석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논은 제주도 지명 곳곳에 남아 있는 '노루'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노루는 호수를 뜻한다. 노르의 변음이다. 실생활에서는 '한놀'로도 발음했을 것이다. 본 기획 18회 백록담 편에 설명했다. 그러면 하논은 '큰 호수'라는 뜻이 된다. '한 노르'라는 발음을 하논으로 받아들이고, 논이라는 어휘에 익숙한 기록자가 대답(大畓)이라 한자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보르미' 오름, 보름달을 닮았다니 어처구니 없는 해석


화구 내에는 화구구인 보름이가 화구 중앙부에 있다. 표고 85.4m, 자체 높이 30m, 저경 454m다. 화산 분화 후 2차로 형성된 화구구라고 한다. 여기엔 보름이(보르미)를 비롯해 서쪽부터 궤오름 혹은 궤보름, 누운오름 혹은 눈보름, 족은오름 혹은 족은보름이라 부르는 원추형 소화산체가 있다. 카카오맵과 네이버지도에는 보름이로 나온다. 사실 이 말은 '보르미'의 오기다. 그래도 공식적으로 보름이라 쓰고 있으므로 정명은 '보름이'이되 실제 내용은 '보르미'가 맞는다.

보르미를 서홍동 역사문화지에는 '큰보름'으로 표기했다. 여기에서 '큰'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오름인 3개의 오름에 비해 크다는 뜻으로 대비지명에 해당한다. 지역에서는 보로미, 보루미로도 부르는데, 보로봉(保老峯), 보루미(保累尾), 보루봉(寶樓峰), 월매봉(月梅峯), 포로봉(抱老峯)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큰보름, 눈보름, 궤보름를 큰보로미, 눈보로미, 궤보로미라고도 부른다. 제주도에서 펴낸 제주의 오름이라는 책에는 '보롬이'라고 표기했다. 포로봉이라거나 월매봉이라는 이름 외에는 모두 다소간 변음이 있을 뿐 보로미 혹은 보르미라고 하는 것 같다.

여기서 봉(峯)이라는 지명소가 들어간 것은 '미'가 산의 뜻일 거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이다. 즉, '미'를 '산'을 지시하는 '뫼'에 유래한 것으로 보고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미'라는 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주어에서는 물을 지시한다. 고구려어에서 기원한다. '마', '미', '메', '매', '뫼' 등은 '물'을 지시한다는 내용은 본 기획 98회 이래 몇 회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르미라는 오름 지명은 물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논 일대에는 '말망수'를 비롯해 10개 이상의 샘이 여기저기서 솟는다.



하논은 큰 호수, 보르미는 불룩하게 솟은 물 있는 오름


그럼 '보르' 혹은 '포르'란 무슨 뜻일까? 대체로 보름달과 같이 생겨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해석은 거의 모든 문헌에 공통적이다. 제주 지명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오류에 해당한다. 음상의 유사성을 가져다 붙이는 격이다. '보로미'를 '보롬이'에서, '보르미'를 '보름이'에서 온 말로 보고 여기에 '보름'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보름달과 연관시키는 현상이다.

보르는 앞 회에서 설명한 바리메의 바리와 어원을 공유한다. 즉, '바리메'의 '바리'란 '불룩한', '부풀어 오른 부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큰'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특히 퉁구스어에서 보이는 '풀-'에서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포로봉(抱老峯)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퉁구스어에서 기원한 고어의 흔적이다. 바리메의 바리는 우리말 '불룩하게 부풀어 있다'의 뜻으로 쓰는 '부르다', '부른' 등에 대응한다. 제주어 '불룩하다'가 가장 가깝다. 제주어에서 '바래기'란 말이 있다. 과거엔 매우 흔히 썼던 말인데 요즘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다. 그래선지 제주어 사전에도 합당한 설명을 볼 수 없다. 이 말은 '많이', '불룩하게' 등을 의미한다. '바래기 줘불라' 같이 쓴다. 이 말은 '많이 혹은 불룩하게 줘 버려라'의 뜻이다. '친정 엄마가 바리 바리 싸 주시더라'라는 말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이 지명은 바리메와 같은 말이다. 하논은 큰 논이 아니라 큰 호수라는 뜻이다. 보름이는 보르미의 오기다. 불룩하게 솟은 물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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