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옛 명칭은 옷귀. 남원읍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신흥2리, 서쪽은 한남리, 남쪽은 남원리와 태흥리, 북쪽으로는 수망리와 인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 서중면 시절에는 오일장이 열리던 면소재지였다.
풍수지리에서 일컬어지는 양택지와 음택지 구분으로 보면 제주의 6대 양택지 중에 둘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 의귀리라고 한다. 그만큼 지세가 신묘하고, 좋은 정기가 흐르고 있어서 옛 선인들이 탐낼 만한 땅이었다는 것이다.
제주에서 보기 드물게 두 개의 하천이 통과하고 있다. 서중천과 의귀천. 건천이지만 선데기소, 박대기소, 창세미소 등 지류에 소가 많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건너가는 다리 또한 많다. 리 단위 마을에 이렇게 다리가 많은 곳은 흔치 않을 것이다.
4·3 당시에 여느 중산간 마을들처럼 토벌대에 의하여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던 아픈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의귀초등학교에 중대병력 정도의 군인들이 주둔하여 전초기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주민 250명이 희생되는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왔다. 학살당한 분들은 현재 현의합장묘에 안장되어 있다. 불타버린 마을에 대한 재건이 194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동산가름과 웃물통, 장구못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였다. 마을이 번창을 거듭하여 그 지역에까지 주거공간이 마련되어질 날을 고대하게 되는 것은 필자의 소망뿐이랴.
의귀리 마을 명칭의 연원을 제공하는 김만일 가문의 역사를 알아야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1300필 넘는 군마를 헌납하여 그 공으로 인조6년(1628년)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어 헌마공신으로 길이 칭송되고 있는 김만일. 마을 이름 의귀(依貴)는 '임금이 하사한 귀한 옷이 당도한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니 김만일가문의 우국충정을 다소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을의 우월적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했으리니.
가장 중요한 관심은 과연 무엇이 김만일 가문으로 하여금 '말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의귀리를 택하였는가?' 하는 대목이다. 조선 왕조가 제주의 일개 가문에게 세습권한까지 주면서 아쉬워했던 명마생산 노하우. 그 비결의 터전.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하여 태흥리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12.1㎞ 서중천을 따라가며 펼쳐진 목초지에 사람보다 말이 더 많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명마를 키워낼 수 있었던 자연환경적 요인과 이를 용도에 맞게 조련하고, 순치시키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말이 병이 들거나 다치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것인지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축적된 지식이 없었다면 무려 218년동안 산마감목관을 김만일가문이 세습하여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문치주의 사대부 국가 조선왕조가 변방의 섬 제주의 목축업자에게 종1품 벼슬을 줘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공맹의 도리나 뇌까리며 따지던 자들이, 그저 글자 다루는 재주로 벼슬을 얻던 시대에 후손들까지 공신가문의 역할을 인정한 이유는 딱 하나다. 말 키우는 능력. 김만일 가문이 보유한 노하우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기에 '딜'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조선팔도에서 김만일가문이 키우는 훌륭한 말들을 사기 위해 육지 상인들이 의귀리에 들어와 며칠을 숙식하며 거래를 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경제가 살아나 마을이 번창하고 상대적인 풍요를 누렸다는 이야기.
양인호 이장이 밝히는 의귀리의 미래는 '차별화된 경쟁력 확보'에 있다고 강조한다. 마을이 보유하고 있는 자연 환경적 장점과 강점들 중에서 무엇이 김만일 가문의 보유하였던 독보적인 가치처럼 세상이 아쉬워서 찾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한 가치가 많은 곳임에도 행정논리에 입각하여 선례를 따지기에 급급하여 모방과 답습을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은 지 안타깝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시각예술가>
길보다 낮은 집 풍경<수채화 79㎝×35㎝>
장마철에 퍼붓던 비가 잠시 멈추고 구름 사이로 뙤약볕이 쏟아졌다. 아직도 아스팔트는 다 마르지 않았거늘 큰 고목 아래서 더위를 피하며 그렸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거니와 상대적이다. 큰 나무 아래서 바라보는 햇살은 더욱 눈부시다. 하천이 두 개나 흐르는 마을이라 냇가 바로 옆집은 지붕의 높이 정도의 길이 바로 옆으로 지나간다. 나무로 우거진 배경과 근경을 형성하는 길 사이에 집이 있다. 그리고 모든 공간을 압도하는 고목이 유서 깊은 마을의 역사를 묵묵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집과 길, 그 사이에 나무. 집과 길이 상징성을 진한 존재감으로 드러내 보이는 정겨움. 단순한 대비효과가 글로 표현 할 수 없는 어떤 메시지로 와 닿는다. 7월의 강렬한 태양광선을 아주 단순한 배치 속에서 그려내려 하였다. 원경의 나무들은 굵은 터치들로 담백한 맛을 더하도록 하였으니 앞 근경 또한 통일성을 이뤄야 하니 이 또한 그림이 지닌 매력이다. 완벽하게 짜여진 구도란 실재 풍경 속에서 확률적으로 등장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공간감을 증폭시킬 정도의 알맞은 잘라내기는 화면의 구체적 탄력을 더하게 된다. 사람과 자연으로 유추되는 집과 나무. 그리고 사회라고 하는 세상을 이어주는 길이 으뜸화음처럼 이렇게 만나서 누군가의 그림이 되고, 다시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저 집 주인과 저 나무의 나이는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나무의 나이테와 인생의 연륜이 그토록 가까운 관계였음을 새삼.
창세미소 배고픈 다리<수채화 79㎝×35㎝>
너무 소중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배고픈다리.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곳이다. 자연이 부여한 냇가의 높낮이를 있는 그대로 길을 만들어 다리를 대신하였다. 가장 제주적인 모습 중에 하나였거늘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다행스럽게 의귀리에서 만나니 반갑고 그 의미가 커서 그렸다. 물이 고인 소 옆을 지나는 배고픈 다리는 참으로 특징적이다. 보통의 명암법을 가진 그림으로 그렸다가는 숲으로 우거진 냇가에서 어떤 주제의 존재감도 확인 할 수 없었기에 고민 끝에 전통 백묘법을 차용하여 목판화 밑그림 스타일로 그렸다. 빽빽함과 한가로움이 대비되는 효과를 가지고 붓의 운필 맛을 살리는 방식을 취하면 소와 배고픈 다리가 여백처럼 크게 자리잡고 나타나게 된다. 생활문화 유산이기에 더욱 고풍스럽게 느끼도록. 화산섬 제주에는 냇가들이 많다. 대부분 건천이지만 폭우에 내가 터져서 중간 중간 움푹 파인 위치에는 소라고 부르는 못들이 형성되어지곤 한다. 밑창이 어디인지 알지 못할 정도 깊은 소라는 뉘앙스를 지닌 창세미소는 가뭄이 심하여 다른 마을 냇가에 물이며 샘들이 모두 말라버려도 항시 풍부한 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 이름값을 해오고 있다. 수도가 없던 시절,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할 때에 가뭄이 닥치면 인근 마을 사람들은 물론 멀리 가시리에서까지 이 곳 창세미소까지 와서 물을 길어갔다고 한다. 제주에 숱하게 있었던 배고픈 다리의 명맥을 잇고 있는 문화재라 생각하고 그렸다. 문화재 지정이 필요한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