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연유산 지질자원 위로달이 머무는 아름다운 마을
[한라일보] 화산회토와 사질토양, 얇게 흐른 용암들이 만든 빌레들, 굵은 암반, 모래와 바람이 범벅이 된 듯한 풍토 속에서 이 마을 선인들이 살아왔다. 그토록 사람이 살기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들이 엄청난 지질학적 가치를 품은 자원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앞에 붙는 수식어도 화려하다. 유네스코 제주 세계자연유산마을. 용천굴, 당처물동굴, 남지미동굴 등이 있어서다. 마을 지하에 이러한 동굴들이 지나가고 있다. 지질 생태자원을 가지고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자부심. 그 이면에 드리워진 월정리 주민들의 고통이 먼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하에 엄청난 지질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활용할 수 없는 마을. 원형보존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2007년 이후, 월정리 주민들은 이런 행정용어에 익숙해 있다. 환경영향평가, 문화재 검토대상 구역, 핵심지역, 완충지역 등등. 모두가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법적 규제를 의미한다. 마을 자체가 세계자연유산 동굴 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니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 재산권 행사에 엄청난 제약을 받는 고통. 겉은 화려하나 속은 타들어 가는 심정, 그 심정이 월정리다. 마을공동체와 주민피해에 상응하는 행정적 조치가 무엇인지 계속하여 묻게 된다. 제주의 가치를 높여주는 땅에 사는 사람들 받는 불이익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보상이 있어야 한다.
김창현 이장
설촌 연대를 묻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용천동굴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드러난 동굴 속에 있던 병이며, 항아리, 질그릇 16점과 철창 1점. 7세기 말에서 8세기 말의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탐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월정리의 옛 이름은 무주리(無注里)다. 포구 이름 무주개를 마을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촌락을 형성하면서 마을이 번창하게 된 것은 400년 정도로 전해지고 있다. 월정리라는 이름은 한학자였던 장봉수 선생이 테우를 타고 바닷가에 나가서 마을을 바라보니 마을 모습이 달과 같아 월정리(月汀里)라 부르기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달이 노니는 물가'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달빛 아래 아름다운 마을이다.
'맬 잘 들민 월정, 멜 안 들민 멀정' 이라는 뼈 있는 말이 전해진다. 그만큼 월정리라고 하면 멸치잡이가 왕성했던 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었으리라.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해변이 마을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한 주민들이 모여들어 멸치그물을 당기는 집단어로의 기반시설이었던 것이다. 제주 최초로 어업조합이 만들어진 곳이 월정리. 그 멸치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 초에 지역주민들이 한모살 부근에 멸치가공공장을 만들어서 일본에 수출했다고 하니 제주바다에서 잡히는 멸치의 집산지였다는 의미가 된다. 70대 초반까지 한모살 부근에 큰 말뚝을 박고 1㎞ 밖 바닷가에 그물로 가둔 물고기를 마을 주민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하듯 잡아끌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동체문화가 문화재적 가치로 전승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아쉽다. 복원하여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김창현 이장이 밝히는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정신이요 강점은 이렇다. 조상 대대로 "다른 마을 사람들보다 두 배로 일을 해야 잘산다." 근면과 성실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기고 살아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정신문화다. 자연적인 여건이 풍요로운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노력을 두 배로 늘려서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부지런한 부자들을 탄생시키고 대물림하여 줬던 상속정신이다.
시대가 바뀌어 월정리 해변이 관광객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는 상황에 이르렀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모래해변을 감싸는 서정적인 멋.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월정리 한모살 썸머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인지도와 대중성까지 확보한 상태이고 보면 앞으로 사계절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 자명해 보인다. 세계자연유산 마을이라고 하는 타이틀과 함께 주민소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달이 머물고 싶은 곳<수채화 79cm×35cm>
한라산이라고 하는 하나의 지붕 아래 모여 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테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해질녘에 한모살 부근 포구로 들어오면서 바라봤을 풍경. 해변에서 남쪽으로 오르막이 있으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에 불이 밝혀지고 짙은 어스름에 가려져 마을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었을 터. 한라산의 능선이 참으로 초가집의 물매를 닮았다. 하여, 그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다. 한모살 해변은 일몰 이후 한라산의 신비감과 함께 바라보면 경이로운 즐거움을 선물 받게 된다. 이렇게 초승달이라도 뜨게되면 우주의 시간성마저 여기서 머물게 되는 것.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다 보니 상가들과 가로등 불빛이 바다 위에 펼쳐진다. 은은한 일몰과 조용한 빛의 축제를 연출하고 있다. 수채화의 특성으로는 이 시간대의 어둠을 표현하는 것은 생소한 도전에 가깝다. 멀리 산과의 거리감에서부터 초승달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화면이 가지는 비례에 대한 안배가 면도날처럼 날카롭지 아니하고 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은 공간적 긴장감 그리기다. 월정리의 달은 '한라산과 함께 한모살 해변에 머문다.' 한라산의 북동쪽에서 바라보는 편안한 느낌의 능선은 신비감에 있어서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물매각도와 일치한다. 가장 이상적인 신성함을 보유한 안정적 각도. 그에 대한 실증적 해답을 여기 월정리 해변에서 발견한다. 저 도도한 초승달이 천강에 아니 비치는 곳 없으려니와 머물고 싶은 이유가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고 하더라.
밭을 그리는 마음<수채화 79㎝×35㎝>
가장 파격적으로 월정리의 이 밭을 그리고 싶었다. 위아래로 밭담. 가로로 위아래는 잘려 나가게 그렸다. 아래는 근경이며 위는 원경이 된다. 돌의 크기가 극단적으로 차이를 보이면서 시각 경험에 의하여 어느 정도 거리와 면적을 가진 밭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사질토양을 가진 밭이라고는 하지만 모래 색이 저 정도 환하게 등장한다는 것은 농사를 지어 소출을 얻기에는 적합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흙이요, 밭이니 돌과 자갈을 치우고 밭을 만들었을 과거 어느 시점의 월정리 사람들. 화학비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던 시절에 제주어로 '둠북'과 감태를 비롯한 바다 해초들을 저 밭에 거름으로 뿌려서 농사를 지어야 했던 각오의 근거다. 더 큰 노력으로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그 결기를 이어받고자 그렸다. 저 밭을 통하여 월정리 사람들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쉬운 길을 찾아 떠날 수 있었지만 어렵고 힘들더라도 여기에서 승리를 거두겠다는 자세. 거창한 애향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낳고 자란 곳에 대한 어떤 의무감이 저 모래흙 속에서 매해 뿌리를 뻗었으며, 가뭄에 타들어가 말라 죽기도 했을 것이다. 화면 구조로는 밭담과 밭담 사이에 여백과 같은 공간이다. 얼마나 많은 원망의 눈물이 저 밭에 뿌려졌을까? 밭일하며 징징거리는 자식들에게 '눈물 흘릴 시간이면 땀을 흘리라'고 다그치던 어머니의 억센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살아남은 승리자들의 밭. 월정리의 모래밭은 세계정신유산이다. 세계자연유산을 능가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