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7)제주대첩, 바다를 넘어

[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7)제주대첩, 바다를 넘어
영암성 지킨 양달사… 시묘 공원·장독샘 전설로 살아나다
  • 입력 : 2023. 08.01(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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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첩 이전 1555년 5월 모친 상중 상복 입고 군사 모아 전투
1970년대 영암군 조명 작업 중단 이후 2019년 현창사업회 출범
젊은 층 주축 기념사업회 추가 구성… 장기적 영암성 복원 제안

[한라일보] 빗방울이 흩뿌리는 날씨 속에 무덤 위 초록 풀들이 선명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전남 영암군 도포면 봉호정 마을 입구에 자리한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梁達泗) 시묘(侍墓) 공원'에서 마주한 풍경이 그랬다. 영암은 제주대첩에 앞선 1555년 을묘왜변의 또 다른 현장이다. 그 중심에 양달사가 있었다. 공원의 명칭은 전투(의병장)와 상중(시묘)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을 헤쳐갔던 인물의 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암은 양달사를, 을묘왜변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양달사의 고향인 영암군 도포면 봉호정 마을 입구에 조성된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시묘 공원'. 진선희기자

▶창우대 광대놀이 전술로 왜구 공격 대승 거둬=본관이 제주인 양달사(1518~1557)는 지금의 시묘 공원이 들어선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양달사는 1536년(중종 31) 무과에 급제했고 1544년(중종 39)에는 중시에 합격한다. 해남현감으로 재직하던 양달사는 1553년 2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부모의 상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삶)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시기인 1555년 5월 11일 왜구가 수십 척의 병선을 이끌고 영암 달량진(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침입한다. 이틀 뒤인 5월 13일 벌어진 전투에서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이 죽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붙잡힌다. 서남해안에 흩어진 성들이 잇따라 함락되며 그 일대는 끔찍한 전쟁터로 바뀐다. 이 무렵 양달사는 상복을 입은 채로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영암성으로 향하는 왜구들과 맞설 준비를 한다. 5월 24일 새벽 왜구가 영암성을 포위하자 양달사는 의병대를 이끌고 영암향교 뒷산에서 매복했고 이튿날 오전 미리 분장시킨 창우대의 광대놀이에 현혹된 왜구가 방심한 틈을 타서 적들을 급습해 승리를 거둔다.

영암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묘 유적.

이 과정에 장독샘 전설이 전해온다. 왜구들에게 에워싸여 군량미가 떨어지고 음료수가 고갈돼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던 군사들 앞에 양달사가 군령기를 높이 들고 한번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찧자 '쾅'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이에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터져 나온 물로 갈증을 달랜 뒤 사기가 충천해 적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영암군청 앞에 가면 전설 속의 장독샘을 볼 수 있다.

양달사에 얽힌 봉호정의 시묘 유적과 영암군청 장독샘은 2019년 8월 관련 조례에 따라 영암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당시 도포면은 이런 내용을 알리는 자료를 내면서 "양달사의 충효의 얼이 깃든 어머니 묘소와 장독샘이 영암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양달사 의병장 현창 사업이 더욱 활발히 추진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영암군청 인근에 있는 장독샘. 바로 옆에 양달사 공적비가 세워졌다.

▶양달사 유적 영암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치마돌격 주역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일일이 기록된 것과 비교하면 양달사의 존재감은 정사에서 미미한 편이다. 영암을 지킨 공이 큰 양달사이지만 모친상을 치르던 때여서 극구 포상을 거절했다고 한다. 양달사는 '호남읍지' 등에 활약상이 상세히 기술되면서 생이 다한 뒤인 1847년(현종 13) 10월 17일에야 좌승지로 추증된다.

영암에서는 일찍이 양달사를 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1971년 영암군수 명의로 장독샘 옆에 공적비를 건립했고 1974년 6월에는 전라남도 도지사와 국회의원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영암군수가 위원장을 맡아 어머니의 묘소 앞에 '호남창의영수(湖南倡義領袖) 양달사선생순국비'를 세웠다. 하지만 이 같은 활동은 1980년대 이후엔 중단됐다. 몇몇 유적들이 영암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양달사현창사업회 이영현 사무국장이 영암성의 흔적이 확인되는 곳을 안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문구처럼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有功達泗歸何處)'라는 한탄이 나올 법했던 오랜 침묵을 깨고 '양달사현창사업회'가 꾸려지면서 다시 영암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2019년 7월 27일 창립 발기인 대회, 같은 해 9월 25일 창립 총회를 잇따라 열었던 현창사업회는 이듬해 영암군청 인근 건물 3층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시묘 공원, 장독샘 정비 등을 진행해 왔다. 이들은 을묘왜변 당시 "51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영암성 일대가 전쟁의 불바다로 변했을 때 양달사가 분연히 일어나 왜구를 물리쳤음에도 의병장이라는 이유로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지 않았다"며 "역사를 바로 알리고 양달사 의병장을 호국 영웅으로 기리고자 한다"고 출범 의미를 설명했다.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장독샘 전설이 사라지지 않고 내려왔듯 양달사의 정신도 그렇게 영암 사람들의 가슴으로 흘러오고 있다는 믿음에서다.

현창사업회의 이영현 사무국장은 장편 역사소설 '바람벽에 쓴 시'(2020)을 펴내는 등 양달사를 오늘날 우리 앞으로 불러내는 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다. 도포면장을 역임하는 등 공직에서 퇴임한 이 사무국장은 양달사를 '조선 최초 의병장'으로 부르고 그날의 전투를 '영암성대첩'으로 명명해 왔다.

월출산을 품고 있는 영암에서 만난 그는 "이 사업이 지속되려면 단체가 영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현창사업회와 별개로 영암군의 40~50대 청년회를 주축으로 '영암성대첩기념사업회'가 구성됐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영암군 11개 읍·면에서 회원들이 고루 참여했다는 기념사업회는 특정 문중이나 명망가 위주에서 탈피해 젊은 층의 자발적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높다고 했다.

영암읍 곳곳에 그 흔적이 확인되는 영암성 복원 사업을 장기적인 기념 사업의 하나로 꼽아온 이 사무국장은 "오랜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지만 영암성 일부 구간이라도 복원을 추진해 영암군의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길 바란다"며 "현창사업회가 계획한 영정 제작, 동상 건립도 전문가 포럼 등을 거치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영암=진선희기자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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