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7부작 시리즈 '마스크걸'은 욕망을 드러내고 들어내기 위해 가면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다른 누군가는 과거를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가면을 쓴다. 또 다른 어떤 이는 평생을 품에 품은 복수를 위해 가면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등 뒤 손이 닿을 곳에 숨겨 놓은 가면들은 그렇게 욕망의 무수한 색깔들로 뒤엉켜 나도 몰랐던 나의 얼굴이 되고야 만다.
흥미로운 설정과 섬세한 프로덕션 그리고 감각적인 연출로 인해 몰입감이 높은 이 시리즈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가면을 쓴 배우들의 연기다. 연기라는 것이 누군가의 가면을 피부처럼 쓰는 일이라고 한다면 '마스크걸'이라는 가면은 밀착되는 순간부터 배우의 숨통을 조이는 쉽지 않은 착용감을 지녔다. 가감 없이 욕망을 전시해야 하고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의 전사까지 차곡차곡 쌓아내야 보는 이들에게 감각 이상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인상적인 가면무도회를 펼치지만 시리즈의 마지막 회를 시청한 뒤 한 번도 누구와 춤춘 적 없던 이의 마음이 가장 아리게 전해졌다. 극악무도한 빌런 김경자를 연기한 배우 염혜란이 그 마음을 전해준 배우다.
'마스크걸'의 김경자는 비뚤어진 모성애를 그리는 인물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던 인물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 번도 넘치게 돌려받지 못했던 사랑이 그를 그토록 절절 끓게 만든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볼 틈이 없을 정도로 평생을 숨 가쁘게 살았던 그는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로 덜컥 가면을 쓴다. 그리고 그 가면을 벗을 여유도 없이 움직인다 아니 움직여진다.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질주다. 피가 철철 나는 상처에 반창고도 붙이지 않은 채 폭주하는 김경자가 수많은 딱지를 심장에 새기는 걸 보면서 한 번도 그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마음을 다 이해할 수도 그 처지를 동정할 수도 없는 복잡한 심경이 드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바로 배우 염혜란이다.
배우 염혜란이 눈에 들어온 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였다. 극 중 진주댁으로 등장한 그는 정말이지 그 시장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했다. 자신의 과거를 밝힌 옥분(나문희)에게 그간의 서운함을 일순간 떨쳐버린 채 엉엉 울며 그를 끌어안는 진주댁 염혜란의 모습은 수많은 눈물 버튼을 탑재한 이 영화에서도 눈물샘을 말라 버리게 할 정도로 뜨거운 장면이었다. 나이를 짐작하기도 속내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배우 염혜란의 얼굴을 그 이후로도 늘 변화무쌍했다. 염혜란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변호사 홍자영 역할을 맡아 이전의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른 단단하고 매력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으로도 우뚝 섰다. 순하고 착한 인물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 같은 역할을 누가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영화 '빛과 철'의 염혜란은 또 다르다.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두 여자 사이에서 피어나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를 차분하게 따라가는 이 작품에서 염혜란은 사고로 2년째 의식불명 상태에 놓인 영남 역할을 맡았다. 풀 수 없는 진실과 풀리지 않는 의문 사이에 놓인 영남을 연기하는 배우 염혜란은 마른 종이에 번지는 물처럼 버석하고 축축하다.
인물의 감정으로 보는 이를 적시는 힘, 자신의 상태를 건조시킨 뒤 캐릭터의 감정을 흡수하는 자세. 배우 염혜란의 무심한 탁월함을 그 상태에 있다. '마스크걸' 이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염혜란의 얼굴 또한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지독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 강현남을 연기한 염혜란은 매 맞고 살지만 명랑한 현남 역할을 뭉클하게 그려냈다. 삶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으로 타인과 스스로를 구원하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현남의 얼굴은 염혜란의 세공으로 눈부시기 그지없었다.
수없이 많은 가면을 쓰고 가면과 피부 사이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배우라는 직업. 배우 염혜란은 가면의 촉감을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이다. 좌절과 희망 사이, 기쁨과 분노 사이, 온기와 냉기 사이 인간이 느끼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고를 그 누구보다 선명한 감각으로 보여주는 배우. 빛나는 별들 사이에서 또렷한 색의 그라데이션으로 어둠을 끌어안고 여명의 순간까지 숨을 고르는 그의 연기에서 늘 감탄 이상의 감동을 받게 된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