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46)한경면 판포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46)한경면 판포리
산, 들, 바다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마을
  • 입력 : 2023. 09.08(금)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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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한경면에서 가장 동쪽 마을, 한림읍 월령리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조수리와 저지리가 있다. 북쪽은 당연히 바다. 옛 조상들이 부르던 이름은 '너른개' 또는 '널개'라고 불렀다. ‘세종실록’(1439년)에 도안무사 한승순의 보고에 '동쪽 김녕에서 서쪽 판포에 이르는 10곳에 봉화와 후망을 정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 '판을포'라고 불리어 오다가 후기에 들어서 판포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널개오름을 가운데 두고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참으로 아름다운 공간적 풍요를 만들어내면서 안정감을 찾으려는 자세를 지녔다. 이 마을 조상들이 풍수지리 차원에서 '배의 모습'으로 바라본 것은 설득력이 커 보인다. 상동 지역이 이물이고 가마귀동산을 고물 삼아서 미밋에 뱃대를 꽂았다는 이야기. 남동쪽 머루왓과 오름 동쪽을 돌아서 한이왓 부근까지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방풍 역할을 하는 널개오름 덕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묘한 기운이 감돈다. 바다와 오름, 들판과 동산들이 신의 손길이 개입된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오묘하고 평화롭다. 토양은 자갈과 바위가 섞여있는 미사질양토가 주류를 이룬다. 동네 어르신들의 토질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한림읍 수원 다음으로 좋은 땅이다. 조와 보리밥이 부들부들 으뜸이었지.'

김형철 이장

토질이 좋아서일까. 조선시대 마을 인근에는 관아에서 관리하는 판지과원이 있었다. 대대로 비옥한 토양에서 농사를 지어왔지만 물 사정은 좋지가 않아서 생활용수의 대부분을 봉천수에 의존해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7개의 자연취락이 형성된 것은 반농반어의 장점과 비옥한 토양에서 소출이 좋았기 때문. 화학비료가 보급되기 전, 바닷바람이 강하기로 유명해서 감태 등 해초가 바닷가에 많이 밀려와 이를 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도 마을 발전에 한몫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1930년에 발행된 '제주도편람'에 판포리는 262호에 인구 1249명으로 되어있다. 면적에 비해 엄청나게 큰 위상을 가진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러한 마을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으며 출향한 인사들이 각계에 진출하여 판포리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바람 부는 날 판포리의 바다는 거칠다. 해변의 모습이 그러하거니와 북서풍이 매몰차게 부는 겨울 바다는 용맹스런 장수의 고함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런 날, 조금 지대가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이 섬의 선인들이 추구하였던 마음의 자세가 떠오른다. '하늘 울엉 비 갠날 이시멍, 보름 불엉 절 갠날 싯느냐.'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통하여 극복 의지를 나타냈던 저 포구의 심정을 느껴본다. 맑은 날에 황홀하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낭만도 있지만 판포사람들의 진가는 모진 비바람과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 그 기백에서 발견하게 된다.

김형철 이장이 밝히는 판포리의 자긍심은 이렇다. "사람들의 품성이 온유합니다. 다툼을 싫어하는 기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논하여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 수월합니다." 마을공동체의 특징을 하나의 자긍심으로 표현하였다. 아이러니다. 겨울철 몰아치는 소형 태풍급 바람에 시달려온 사람들이 오히려 유순한 성품으로 다른 마을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두 세대 전이면 오직 부농의 꿈으로 삶을 살았을 세대다. 지금은 발전 방향에 대하여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시대임을 대부분 반영하고 있다. 판포리 또한 다르지 아니하다. 특히 널개오름을 활용하여 관광자원화하는 대목에 관심을 쏟는 분들이 많았다. 외형적으로 과거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보이는 마을, 그래서 편안한 느낌을 받게 되는 마을이지만 내면에서는 의식의 성장을 괄목하게 이뤄낸 마을이다. 지킬 것은 지켜가며 더 큰 부가가치 창출을 위하여 줄달음질치는 판포리다. <시각예술가>



거친 바닷바람이 돌담에
<수채화 79cm×35cm>


멀리 희미하게 비양도가 보이는 바닷가 마을. 대표적인 '바롬카지'라고 하는 판포리해변을 그렸다. 조금은 인상주의적인 비사실을 동원하지 아니하고서는 바다에서 몰아치는 바람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 여겨서 시도하였다.

중요한 대목은, 밭담과 돌담에 마저도 바람이 붓질을 타고 들어와 차지해 버렸다. 물상과 바람이 한 몸이 되었을 때 바람은 표현되어지는 것. 판포리 바닷가 매몰찬 바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탄생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림 속에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숨겨두고 싶은 사연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이런 스타일로 그리게 된 연유가 있다. 오른쪽 위, 지붕과 바닷가와 인접한 집담의 관계가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오래전부터 마을 어르신들과 만나서 자주 듣던 판포리의 바람과 집담의 지혜를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서다.

오랜 세월 숱한 시행착오에서 온 저 집담의 높이. 저 높이 보다 높으면 바람에 허물어지고 저 높이보다 낮으면 지붕 처마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니 가장 적절한 높이의 협상물이다.

반복되는 실패가 얻어낸 아름다운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판포리 바닷가 집담을 바라보며 조상들의 끊임없는 돌쌓기의 노고가 전해져 온다.

집담 앞에 밭담은 거기에 비해 아주 낮다. 채소와 같은 것을 갈아서 먹던 텃밭 정도다. 그래도 외성처럼 바람을 일차적으로 막아내고 들어오니 약화되었을 터.

판포리 조상들의 지혜가 넘쳐나는 이 길을 걸으며 어떤 소중한 가치를 얻으려 했다.



판포리 평화로운 풍경
<수채화 79㎝×35㎝>


지금은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져버린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저 멀리 한라산에서부터 앞에 있는 밭담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오름들이 펼쳐져 있고, 널개오름 동쪽 부분이 화면에 들어와 마치 자연이 둥지가 되고 집들이 알처럼 그 속에 조심스럽게 놓여져 있는 느낌이다. 이런 아늑함 위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이 마을 조상님들이 부럽다. 난개발의 광풍이 몰아치는 과정에서도 이 섬이 보유하고 있는 진실로 아름다운 모습들을 지켜내는 모습에 존경심이 일어나 그리게 되었다.

그리는 도중에 생각하였다. 저 백록담도 이 앞에 돌담 크기만 하구나! 아무리 커도 멀리 있으면 작아지는 것. 이를 어찌 원근법의 이치로만 생각할 것인가. 아주 작은 것도 가까이 두면 크게 느껴지는 마음을 그리려 하였다. 오후 5시의 태양 아래 멀리 한라산 능선에는 구름이 끼어 있고, 오전에 비가 와서 그런가 아직도 대기는 습도가 있어 안개구름이 은은하다. 마치 동양화의 산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라 실질적인 거리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특징적인 관찰이 있다면 돌담의 석질이 너무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하여, 마을에 중장비 일을 하시는 분의 고견을 청취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안에 밭이나 들을 파서 암반들을 보면 너무도 다양한 모습이라고 한다. 널개 오름이 솟아나며 출렁거렸을 땅과 용암을 떠올리는 즐거움을 아이러니 하게도 이 그림 속에서 발견하려 하고 있다. 집들의 평화로운 배치를 즐거운 마음으로 그릴 수 있어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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