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해방 이후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분단국이 아닌 통일 조국을 원했던 제주도민들의 염원은 잔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던 정부는 여수 주둔 군인들에게 제주도 출병을 명령했지만 그들은 무장항쟁을 벌였다. 군인은 전쟁에서 적을 상대한다. 따라서 자국의 민간인을 죽일 수 없다. 여수의 군인들의 생각은 상식적이었다. 여순10·19는 오랜 동안 반란으로 불렸지만, 서서히 진상규명과 신원을 이뤄가고 있다. 제주와 여순에서의 항쟁은 4·19혁명을 거쳐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제주4·3은 해방 이후 항쟁 가운데 최초의 역사적 사건인가? 얼핏 보면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대구10·1항쟁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 화가 강요배가 대구미술관 이인성미술상에 출품한 작품 2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전시에서 10·1항쟁을 다룬 신작들을 출품했다. 경산 지역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룬 '코발트'는 거대한 반추상으로 한국 현대사의 아픈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대구10·1항쟁 시위 장면을 다룬 '가을 어느 날'은 일제강점기의 조선향토색 흐름으로 평가받는 이인성의 작품명을 빌어 1946년 10월 1일의 역사적 사건을 기리고 있다.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구10·1은 해방 이후 최초의 항쟁으로서 역사적·예술적 성찰의 대상이다. 그해 말까지 수십 개 도시로 번진 항쟁의 불길은 이듬해인 3월 1일 제주에서의 집회로 이어진다.
제주4·3특별법이 규정하는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기점이 1948년 4월 3일이 아닌 1947년 3월 1일이라는 점은 매우 유의미한 실마리다. 3·1절 기념집회 사건은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항쟁 현장이었다. 대구항쟁의 불길이 한반도 전역을 거쳐 제주도까지 번진 그날, 참혹한 학살과 위대한 항쟁이 출발했다. 무릇 역사는 개별적인 특수성으로부터 일반적인 보편성을 인출할 때 더욱 단단한 서사를 구축하는 법이다. 제주4·3의 역사적 정명은 여순10·19에 이어 대구10·1과 연대하는 것에서 더욱 강한 고리를 형성한다.
'여순10·19-제주4·3 미술 교류전: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展'이 열렸다. 이 전시는 올해로 2회째를 맞아 35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제주4·3과 여순10·19의 75주년을 맞아 여수민미협과 탐라미술인협회 작가 31명이 출품했다. 여수와 제주는 평화와 인권의 도시로서 연대와 상생의 정신을 담아 이 전시를 함께했다. 탄압과 항쟁, 학살이라는 동일한 역사를 가진 두 지역 예술가들의 뜻과 힘이 뭉친 것이다. 제주와 여순이 한뿌리의 역사라는 인식에서 나온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구와 더 깊게 연대할 궁리를 할 시점이다. 기억하자. 인혁당 사법살인 등을 겪으며 진보의 싹이 잘려 나간 대구는 해방 이후 최초로 미군정의 폭압에 맞선 항쟁의 도시라는 점을. <김준기 광주시립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