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정의 하루를 시작하며] 잠시 멈춰 선다

[김문정의 하루를 시작하며] 잠시 멈춰 선다
  • 입력 : 2023. 10.18(수)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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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부쩍 서늘해졌다. 가을이다. 며칠 전 아파트 앞 화단에 있던 산딸나무를 베어내었다. 어쩌다, 마침 그 앞에 주차해 있었을까. 차를 서둘러 빼야 했고 잠시 후 맞닥뜨린 현장. 얼결에 시선을 뺏겨 잠시 멈춰 선다. 작업부들이 발로 툭툭 찬다. 굵은 밑동이 흔들린다. 힘 뺀 듯한 몸으로 밀자 멀쩡해 보이던 나무가 휘청인다. 이잉이잉… 전기톱질 몇 번에 아름드리가 금세 달랑 서너 동강이 됐다. 뿌리와 그루터기 반 이상이 좀 슬고 썩어 속이 텅 비어있다. 그러고도 잘려 나간 면은 생나무의 맑은 색이다. 기둥의 한 뼘 정도 높이만 남은 나무둥치에 붙어 달랑거리는 잎사귀 몇 장. 잎은 곧 진다 해도 남은 땅속뿌리를 의지 삼아 새 줄기가 솟고 기사회생할지도 모르겠다.

오다가다 자꾸, 등걸 앞에 잠시 멈춰 선다. 어쩌면… 하고 안타까움이 담긴 바람이다. 지난봄 너무 바빠서, 하늘을 향해 꽃잎 환히 열고 있는 널 그냥 스쳐 지났구나. 꽃은 피었었을까. 흰 나비 무리 진 듯 향기롭게 앉았다가 훨훨 날았대도 널 보지 못했구나. 올려다보니 하늘은 빼꼼 더 열렸다. 매일 보던 한 그루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날, 비로소 그 나무의 실체를 본다.

그리고 다시, 나무 한 그루 스러지는 일쯤은 아무 일도 아닌 피비린내 나는 폭발과 화염을 본다. 지구 한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학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공격에 이스라엘군이 보복을 나선다.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생존 자체를 위협하면서 백린탄까지 쏟아붓는 야만. 끝나지 않는 이 전쟁에는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에 원죄가 있다지만 결국 명분과 책임의 경중은 사라지고 모두 피투성이 돼 쓰러지리라는 것. 틀림없는 전쟁의 끝말이다. 마을은 폐허가 되고 무고한 사상자는 속출하는데 대규모 군사작전을 펴기 위한 대피령은 시혜인가. 가엾은 난민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에 우리 정부는 이 전쟁을 빗대 북한의 추가적인 영토 도발 없어도 9·19남북군사합의의 완전 파기나 효력 정지를 검토할 것이라 한다. 싸우자 들면 싸우게 될 것이다. 핵을 옆에 둔 전쟁은 공멸이다.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인 9·19남북군사합의는 모든 적대행위 전면 중지가 핵심이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서해북방한계선 일대의 평화수역 조성, 상호군사적 교류 및 접촉 활성화, 신뢰 구축을 위한 다양한 조치 강구로 군사당국자회담정례화 등이다. 원하는 바 평화다.

전쟁만이 전쟁인가. 가난은 갈수록 편차 커지고 속도와 효율을 원리로 이익만 좇는 시대. 정치·경제·사회 어느 것 하나 편안치 않다. 평화롭게 살자고 조심스레 살피고 대비해야 할 텐데 군사합의의 파기라니. 나라의 처지가 흡사, 앞에 호랑이를 두고 뒷문에는 늑대가 지키고 선 모양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썩거나 좀 슬어 속 비어 쿵! 쓰러지는, 멀쩡한 나무 같을까 봐 두렵다. <김문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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