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해발 1600m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였으면 옛 어른들이 무수(無愁)라는 이름으로 '걱정이 없게 하는' 냇가라고 이름 지었을까? 아니면 냇가 자체에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을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었을까. 거대하고 황당한 꿈을 향하여 이상주의적 욕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 걱정만 없으면 행복이라 여겼던 굳건한 철학이 느껴지는 마을. 섬 제주에서 유서 깊은 마을을 꼽으라면 광령1리를 빼고 설명하기 곤란하다. 마을 북쪽 '너분절' 지경에 무수천 서쪽을 따라 고인돌 12기가 산포되어 있다. 가히 고인돌 지역이라고 여겨진다. 고인돌 내부와 그 주변에서 탐라형성기라고 할 수 있는 BC200~AD200년 사이에 유행하던 적갈색 토기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 탐라시대 규모가 큰 마을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섬의 여타 고인돌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주변에 여러 개의 샘이 있어서 풍부한 생활용수와 토양층이 깊어 농경에도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시대 구분 시점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농경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여건을 풍부하게 충족시키는 무수천이라고 하는 생존공간이 있었기에 고인돌문화가 보편화된 시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판단해야 합리적이다.
광령1리 냇가를 지질과 지형이라는 자원으로 파악하고 자연친화적인 보존형 관광자원화를 마을 자체역량을 동원하여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 견인차로 작용하였던 이 냇가의 의미는 제주인의 원류를 느끼는 공간으로 향유하는 것이 온당하다. 광령은 풍수사상의 입장에서도 산칠성(山七星) 물칠성(水七星)으로 이뤄진 마을이라고 하였다. '산가수청(山佳水淸)하니 光이요, 백성의 민속이 밝고 선량하니 令이라.' 산이 아름답다고 하여 큰수덕, 정연동산, 서절굴동산, 무녀모를, 엄지동산, 테우리동산, 높은모를이 모여서 칠성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연, 거욱대물, 절물, 자중동물, 독지굴물, 행중이물, 셈이모를물 이렇게 샘물들마저 칠성형으로 이뤄져서 옛 대촌 광령리가 되었다고 한다. '칠성동산'이라고 부르는 일곱 개의 동산이 마치 알을 품은 듯 세 마을을 낳으니 바로 광령1리, 광령2리, 광령3리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광령1리는 칠성동산 하단에 길게 누워 서낭동산을 병풍 삼고 무수천을 동쪽 어깨 삼아 설촌 된 마을인 것이다.
아직도 향장(鄕長)의 전통이 엄연하게 유지되는 선비정신의 마을이기에 조상대대로 학자들이 많이 배출돼 세상에 공헌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강창부 이장에게 마을의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대답하였다. "전통계승 의지" 너무 뜻이 커서 구체적으로 쉽게 전달해달라고 하자, 이웃에게 욕먹을 일 하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중한 정신문화를 간직한 제주의 대표적인 마을공동체.
무수천 팔경을 빼면 광령1리의 절경을 느끼기 어렵다. 비경을 보여주는 8개의 명소를 보면 1경 보광천(光川) 2경 응지석(鷹旨石) 3경 용안굴(龍眼窟) 4경 영구연(靈邱淵) 5경 청와옥(靑瓦屋) 6경 우선문(遇仙門) 7경 장소도(長沼道) 8경 천조암(泉照岩). 해발고도가 비교적 낮아 주거지역 가까운 곳에 이런 심산유곡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절경이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움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광령1리가 그만큼 자연친화적인 마을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팔경에 들어있는 명칭이 놀라운 시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자원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오랜 세월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와 화답시를 나누며 읊은 그 마음에서 정착된 것이니 그러하다. 이 소중한 자원을 탐방객들이 자연을 통한 힐링 공간으로 만들어나가고자 줄기찬 노력을 하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의지와 열망이 더욱 아름답다. 문제는 이러한 귀중한 자원을 그저 광령1리라고 하는 마을역량에만 의존 할 것이 아니라 정책적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져야 한다. <시각예술가>
저 밭은 기억한다.<먹 담채 79cm×35cm>
광령초등학교 맞은 편 서쪽 길가에, 주택들이 들어선 사이에 큰 밭이 있다. 인상적이다. 건물이 들어설 가능성이 커 보이는 여건임에도 그냥 경작을 한다. 지명이 고복생이라고 하는 곳, 4·3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에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던 상황. 마을 주민들을 당동산 인근 저 밭 부근에 집결하라고 해서 해안가 마을로 내려가게 한다. 영문도 모르고, 농사일은 어찌하고 고향마을을 강제로 떠나게 하느냐며 따질 분위기도 아니고. 마을 자료에 따르면 4·3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분들이 100여명에 달한다. 가족이 피해를 입은 마을 어르신들의 원통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마을에 만 6·25참전 용사가 67명이며 그 중에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소."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중산간 마을이라고 하여 색안경을 끼고 무참하게 학살을 자행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저 밭은 말이 없지만 역사의 현장이다.
땅이 기억하는 진실을 아무런 색이 없이 오직 먹물로 그렸다. 마치 당시의 흑백사진을 연상이라도 하듯이. 토심이 깊으니 상처도 깊을 것이라는 쓰디쓴 마음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집들이 있다. 파격적인 구도를 설정한 이유는 밭이 가지는 의미를 하늘과 결부하여 표현하고자. 무채색 풍경으로 밭을 그리는 것은 어떠한 이념이라는 색채를 거부하고 싶어서다. 죄 없이 죽어간 분들에 대한 애도의 의미로 밭을 선택하였다. 그 후로도 저 밭에서 매해 곡식이 자랐으며 후손을 먹여 살렸다.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도.
무수천의 가을<수채화 79cm×35cm>
愁라는 한문을 파자(破字)하면 그 뜻이 너무 시적이다. 가을의 마음. 그 느낌을 그리려 하였다. 입동이 가까운 늦은 오후 햇살이 서쪽에서 화면으로 비춰진다. 단풍의 느낌까지야 아니지만 물들기 시작하는 냇가 옆 나무들. 냇가의 암반들은 오른쪽 나무들의 그림자에 차분하게 그 깊이를 더해가며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빛을 받은 곳과 그림자 속에 있는 영역이 절묘하게 만나는 시간적 상황을 그리려 하였다. 멀리 구름들의 명암이 어떤 날씨이며 시각적으로 한라산에 가까운 지역에서 보여지는 구름을 느끼게 한다. 해안지대 구름에서는 발생되기 희박한 구름 무리다. 이 냇가의 위치적 요인. 냇가는 자연발생적으로 해시계의 기능을 한다. 사람들이 눈금을 읽을 수 없을 지라도 묵묵하게 오전과 오후, 아침과 저녁 태양빛의 변화를 그림자를 동원하여 표시한다. 하천변 나무들의 역할이 시각적 풍요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화산섬 하천이 지닌 암반들을 품어주고 있는 둥지의 느낌이다. 무수천의 절경들이 아니라 평이한 냇가의 모습을 그리려 한 것은 빛이 빚어내는 놀라운 효과를 가을이라는 계절에 맞게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나무의 색은 오직 계절이 칠 할 수 있다. 냇물이 없는 건천이지만 바위들의 변화무쌍한 모습에서 깊은 심연의 울림을 발견한다. 가을에는 시름에서 벗어나기를 손망한다. 無愁! 근심 걱정 없는 곳이 어디던가? 모두가 꿈꾸는 어떤 이상향이라 했다. 무욕의 세계를 걸으며 발견하는 그 곳이 여기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