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화전은 오랫동안 제주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단지 수십 년 동안 제주사회가 외면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졌을 뿐이다. 본보 특별취재팀이 지난 6월부터 제주 화전의 흔적을 찾아 나선 6개월은 잊혀진 역사와 화전민들의 삶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어느 특정지역을 중심으로가 아닌 제주도 전역에서 화전이 행해진 현장이 취재를 통해 드러났다. 중산간 지역에서, 정글 같은 숲 지대에서 화전, 화전 마을 흔적이 남아있다. 이는 화전의 실체를 보여주는 주요 문헌 중 하나인 '제주군읍지 제주지도'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1899년(광무 3) 5월에 제작된 이 지도에는 10소장 위쪽 경계담인 상잣성 위쪽으로 9개의 '화전동(火田洞)'이 표기돼 있다. 그동안 학계나 관련 연구자들은 이 지도에 표시된 조선시대 국영목장인 10소장 등에만 주목했을 뿐이다. 지도에 표기된 화전 마을(화전동)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제주의 화전, 화전 마을의 실체가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렇지만 탐사를 통해 화전, 화전마을의 다양한 흔적들, 삶의 현장들이 확인돼 관심이 모아졌다.
서귀포시 서홍동 연자골에서 확인한 대규모 계단식 화전
서귀포시 서홍동 생물도 화전마을에 남아있는 집터
서귀포시 동홍동, 서홍동 일대에서 확인된 연자골, 연저골, 생물도 옛 화전 마을은 사람들이 떠나 잊혀진 마을이 된 지 수십 년 세월이 지났지만 너무나 뚜렷했다. 길게 이어진 이끼 낀 올레담과 돌담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집터, 통시, 우영밭 등이 남아있다. 특히 생물도 옛 화전마을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집터와 올레, 통시 등 다양한 석축 구조물과 몰방애 등이 남아있어 관심이 모아졌다. 여기에 더해 취재팀이 연자골에서 확인한 대규모 계단식 화전밭은 화전과 화전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곤궁한 생활을 견뎌내기 위해 한 평이라도 더 개간하여 경작지로 활용하려는 화전민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제주시 봉개동에서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상잣성이 확인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길이 1㎞ 이상되는 상잣성은 제주도가 펴낸 조사 보고서에도 수록되지 않은데다, 축조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보존 방안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제주도는 현장조사에 나서 후속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제주시 봉개동에서 확인한 대규모 상잣성
서귀포시 안덕면 무동이왓 주민들이 사용하던 몰방애
서귀포시 동홍동 연저골에 남아있는 올레 특별취재팀
화전 마을 대부분은 4·3의 비극 속에 주민들이 떠나면서 잊혀진 마을이 됐다. 이후 주민들의 복귀와 이주, 이로 인한 마을 공동화가 되풀이됐다. 서귀포시 안덕면 무동이왓이나 색달동 냇서왓, 제주시 한림읍 오소록마을처럼 개발 열기로 마을 원풍경이 사라지고, 주민 이주로 인한 마을 공간의 재배치도 일어났다. 이러한 마을 공동체의 변천과 주민 이주사, 마을 공간의 확산과 재배치 등에 대한 연구도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화전 흔적들이 훼손되고 멸실되기 전 전수 실태조사와 기록화 작업이 서둘러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화전과 민란의 관계, 제주역사에 끼친 영향 등 공백기로 남아있는 제주사 연구, 규명 작업도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토대로 보전 활용방안 등을 다각도로 고민해 가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여전히 세상에 드러내야 할 잊혀진 화전, 화전 마을은 중산간지대, 한라산 중턱 곳곳에 있다. 특별취재팀의 탐사 보도는 내년 시즌Ⅱ로 이어질 예정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행정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기고] 진정한 제주 근대사 정립은 화전연구에서부터
진관훈 박사(오른쪽)와 강재홍씨.
진정한 제주 근대사 정립은 화전 연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화전·화전농업·화전민 연구는 제주 근대사의 내재적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딴딴한 키워드이다. 그런데도 화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여전히 미진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 화전 소멸이 빨랐고, 제주민란과 제주 4·3으로 인해 화전민과 화전마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자의적으로 숨겨졌고 왜곡된 탓이 아닌가 짐작만 한다.
지난 20여 년간 후배 강재흥과 함께 개인적 관심 차원에서 화전을 조사, 정리하는 수준이었지만, 제주도문화연합회와 제주학연구센터의 연구지원이 시작된 이래 올해부터 한라일보 특별취재팀의 현장조사를 통해 제주 화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또 화전 농사에 대한 직·간접 경험이나 기억, 과거 화전마을 거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당시 기억을 채록하고 범주화해 정리,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화전, 화전 농업, 화전민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고찰한 뒤, 화전민의 생활 풍속, 문화, 민속 등을 살펴보는 체계적 조사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취재를 통해 제주 특유의 농목교체(農牧交替) 생산방식을 근간으로 하는 생활문화유산인 집터, 계단식 밭과 밭담, 경계 담, 몰방애, 우물, 미보고된 상잣성, 피우가, 통시 터, 올레, 길 등 화전민과 화전 마을의 흔적을 찾아 기록화할 수 있었다. 일부 개발로 인해 흔적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한라산국립공원 내에는 화전 마을 원형이 잠자고 있다.
농업 유산, 생활 유산, 역사 문화 경관 등의 가치가 높은 제주 화전을 고유한 역사자원으로 삼아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우선 화전 마을 복원이나 화전(농경)체험관 설치, 화전 문화 축제 등이 필요하다. 화전민들의 살던 농막 같은 주거 생활, 메밀 등 식생활, 테우리, 방애, 숯 굽기, 사농바치, 약초 캐기 같은 부업 활동 등을 체험함으로써 제주 화전과 화전 문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넓힐 수 있다.
무엇보다 제주 화전 전수조사 기록화가 시급하고, 제주 화전 연구 거버넌스 구축이 중요하다. 전수조사 사업을 행·재정적으로 지원할 지자체와 학회 결성 및 학계와 민간 전문가, 실측 조사와 기록을 담당할 발굴 전문기관, 홍보와 인식 확산을 담당할 언론계 등이 협업해 조사 연구와 기록화에 앞장서야 한다.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