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풍덩의 찰나
  • 입력 : 2024. 04.26(금) 00:00  수정 : 2024. 04. 29(월) 08:54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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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챌린저스'.

[한라일보]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영화의 여주인공 춘희가 말하는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다'는 대사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보는 묘미 중의 하나는 이렇듯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서히 서로에게 젖어드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긋나고 멀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시 곁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보는 이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간혹 '풍덩'의 경험과 맞닥뜨리게 된다. 다 젖고 나서야 그토록 뜨겁던 체온이 어느새 식었음을 알게 되는 격렬한 러브 다이브, 그러니까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전에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어떤 비명들에게 이끌려 가는 순간들 말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러한 이끌림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이 순간들이 남긴 흔적은 다 아물었는데도 지문이 닿는 순간 영사되듯 생생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풍덩'하는 파열음과 함께 몸에 새겨진 나의 우스꽝스럽게 로맨틱하고 비참할 청도로 코미디였던 순간들이.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을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육체적 쾌감을 시각화하는 데 있어서 정말이지 선수다. 누군가의 마음이 달떠서 일상이 송두리째 손에서 스르륵 흘러내리는 찰나를 마치 고양이가 새를 보는 것처럼 포착하는 이가 그다. 호기심을 가득 담아 여차하면 낚아챌 기세를 가지고 말이다. 그의 신작 '챌린저스'에도 그의 인장이 선명하다. 아슬아슬하고 흥미진진한 동시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감각적이다. 테니스를 계기로 만나게 된 세 남녀의 혈투에 가까운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스포츠 드라마의 활력에 젊음의 열기를 덧입힌 청춘물이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에로틱한 긴장감을 쉴 새 없이 채워 넣는다. 경기장의 관객은 좌와 우를 쉴 새 없이 봐야 하고 선수는 앞만 봐야 하는 테니스라는 스포츠, 극장의 관객은 이 상황의 너머에서 눈앞의 순간에 골몰한 이들을 흥미롭게 관전하게 된다.

'챌린저스'는 상대를 향한 고도의 집중력과 순간적인 에너지, 든든한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비단 테니스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캐릭터들 사이의 긴장감은 경기장 밖에서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눈앞의 감정들을 쳐내는 일이, 서로의 타이밍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일이 이들에게는 경기 못지않게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빠져 든다는 것은 감정보다 감각이 앞서는 일이다. 살갗에 느껴지는 낯선 온도, 눈앞이 흐려지거나 돌연 또렷해지는 시야의 확장, 눈치도 없이 흐르는 땀과 목구멍을 넘어 터져 나오는 뜨거운 숨까지 인간의 몸이 얼마나 정확한 감정의 대리인인지, 원망스럽게도 그 정도로 확실하게 일을 수행해 내는지 '챌린저스'는 천연덕스럽게 진술하고 변호한다.

자신이 만든 감각의 제국을 여유롭게 휘젓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관능의 법칙을 만드는 일은 배우들에게 일임하는 편이다.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 배우 틸다 스윈튼, 다코다 존슨, 티모시 샬라메가 얼마나 황홀하고 노련하게 법칙을 만드는 이들이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챌린저스'의 젠데이아, 조쉬 오코너, 마이크 파이스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갖고 있던 세 배우는 이 작품의 캐릭터를 만나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각자의 형태를 더욱 유연하게, 예측할 수 없는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과적으로 셋 모두 매혹의 질감과 부피를 유효하게 획득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세 배우의 사중주처럼 들리기도 하는 '챌린저스'는 신음과 포효, 한숨과 비명이 난무하는 짜릿한 작품이다. 숨 막히는 그들의 랠리가 끝난 뒤 그 탄성과 파열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관객이다. 영화가 끝난 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속된 말을 내뱉는 나를 보았다면 혹시 영화를 만든 이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까. 자신들이 만든 풀 안으로 주저 없이 풍덩 하고 뛰어드는 관객들을 보며 어떤 내기를 걸었을까. 상관없다. 당신들이 이겼으니 앙코르, 앙코르를 부탁한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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