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의 신비, 지질학책에도나오지 않는 거대 호수
[한라일보] 족은대비악은 안덕면 광평리 산59번지다. 표고 541.2m로 중산간 중에서도 높은 곳에 있지만, 자체 높이는 71m에 불과하다. 저경 597m다. 멀리서 바라볼 때 모양이나 크기에서 그저 평범해 보이는 오름이다.
이 오름은 정상에 두 개의 원형 화구를 가지고 있다. 오름의 형태별 분류로 보면 복합형 화산체로 구분한다. 이 오름은 그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호수다.
오름의 서쪽 직경 100m를 넘는 넓은 호수. 정면에 족은대비악이 보인다.
호수도 오름에서 볼 수 있는 산정의 분화구 호수가 아니다. 그것도 아주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두 군데나 있다. 과연 지질학적으로 이 호수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산정에 있는 화구호가 아니라 측방에 있는 호수다. 측방에 있으니 산정호수 대신 산측호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산 바닥에 있으니 산저호수라고 해야 할까? 현재 어떤 자료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오름에는 호수도 없고, 샘도 없다고 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이런 지질학적 측면만이 아니다. 제주도의 오름 지명이 다 그렇긴 하지만 그 이름이 특이하다. 대비악의 대비가 무슨 뜻인가? 대비라는 선녀가 하늘에서 이 오름에 내려와 사방을 두루 살펴보고 놀다간 일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제주도가 발행한 제주의 오름이라는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이름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또 있다. 대비악이라거나 큰대비악은 없는데 왜 족은대비악이라 했을까? 이런 이름 때문에 그냥 대비악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오늘날 이 오름의 명칭은 족은대비악이다. 네이버지도에도 카카오지도에도 이렇게 검색된다. 고전에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1899년에 나온 제주군읍지에 소대부악(小大夫岳)이라 했다. 조근대바악(朝近大妃岳), 조근대비악(朝根大妃岳)이라 표기한 자료도 있다. 그 외로도 대비악(大庇岳), 조근비산(朝近妃山), 조근대악(朝近大岳) 등으로 표기했다. 지역에서는 소근대비악(小近大妃岳), 자근대비(玆近大妃), 작은대비원(-員), 조근대비악(朝勤大妃岳), 족건대부봉(足蹇大釜峰) 등으로 채록한 자료가 있다.
'작은'은 제주 지명어에서 '쇼근', 여러 지명에 반영
이 표기들을 살펴보면 족은대비악은 '족은+대비+악'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소-(小-)', '조근-(朝近-)', '조근-(朝根-)', '소근-(小近-)', '자근-(玆近-)', '작은', '조근-(朝勤-)', '족건-(足蹇-)' 등의 표기는 '족은'이 제주어 '작다'의 관형사형이란 것을 전제로 표기했을까? 당시에도 '족은'은 '작은'의 뜻으로 썼을까? '소-(小-)', '소근-(小近-)', '작은' 등의 표기는 족은대비악의 '족은'을 '작은'의 뜻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근-(朝近-)', '조근-(朝根-)', '자근-(玆近-)', '조근-(朝勤-)', '족건-(足蹇-)' 등은 '작다'라는 뜻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어렵게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오름의 북서쪽 직경 70m에 달하는 호수. 이 호수들은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찬수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에 '작은'의 뜻으로 '효근'을 썼다. 1527년 훈몽자회에는 등자(橙子)를 효근귤이라 하여 '효근'을 '작은'의 뜻으로 썼다. 1610년 허준이 저술한 의서 동의보감에는 등(橙)을 '효근귤 둥', 고라니를 효근노로라 하여 '작은'의 뜻으로 '효근'을 썼다. 1632년에 간행한 중간 두시언해에는 '작은'의 뜻으로 '쇼근'을 썼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쇼근', '효근' 등은 '횩다'라는 고어에서 기원한다. 오늘날의 '작다'라는 말과 뜻은 거의 같으나 이와는 다른 조상어에서 분화한 말이다. 제주도 지명에 나타나는 '작다'는 '횩'에서 나온 효근>쇼근 계열이다. 대표적인 지명으로 서건도가 있다. 이 지명은 작은 섬이라는 의미의 '쇼근섬'이었으나 어두음강세 현상으로 '썩은섬'으로 불렸다. 정말 썩은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안덕면 안덕해수욕장에 연한 '썩은다리'가 있다. 이 오름은 '쇼근달' 즉, 작은 산의 뜻인데, 진짜 썩은 산으로 설명한다.
'족은'은 돌궐어, '대비'는 퉁구스어 기원
족은대비악에 들어있는 '족은'은 뭣에 비해 작다는 것일까. 어떤 이는 근처 왕이메보다 작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왕이메와 더 가까이 있는 괴수치, 돔박이 같은 오름도 왕이메보다 작다. 왜 그보다 훨씬 떨어져 있는 이 오름이 비교 대상이 되었나? 이 '족은'의 뜻은 따로 있다. '조근'이 맞는 표현이다. '작다'라는 뜻이 아니다. '작다'라는 뜻을 쓸 거면 '쇼근'을 썼을 것이다.
돌궐어 기원이다. 돌궐어권의 카라카니드어, 튀르크어, 가가이어, 투르크메니스탄어, 타타르어, 키르기스스탄, 노가이어, 오이라트어 등에 '촉', '족', '직', '칙' 등의 발음으로 '젖다', '(흠뻑) 담그다', '이슬', '습기', 드물게 '날 것'이라는 뜻으로 쓴다. 우리말에도 축축하다, 촉촉하다, (땅이) 질다의 어근은 여기서 기원한다. '족은'이라기보다 '족' 혹은 '촉'이라 했을 것이다. '족대비악' 혹은 '촉대비악'이라 하다가 '족은대비악'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럼 '대비'는 무슨 뜻인가. 알타이제어에 '젖다', '담그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퉁구스어에는 거의 같은 발음이거나 폐음절 '댑-'으로 반죽을 뜻하는 의미로 쓴다. '(땅이) 질다'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이다. 족은대비악 주변에는 현재 커다란 못이 2개소 있다. 댐을 설치하여 저수량을 늘렸다. 과거에는 이 일대가 넓은 습지였을 것이다. 이 오름 지명에도 많은 언어사회가 흔적을 남겼다. 족은대비악이란 물기가 많아 질퍽질퍽한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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