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1953년 3월, 한국전쟁의 마지막 격전장이었던 경기도 연천 네바다 전투. 포탄이 폭풍우처럼 쏟아지던 전투 현장에서 탄약을 실은 작은 체구의 말 한 마리가 '죽음의 고지'로 불리던 판문점 북방의 베가스, 리노, 카슨 고지를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무게가 88㎏에 달하는 탄약통을 진 이 말은 하루에만 51차례 고지를 넘나들며 약 56㎞를 달렸고, 5t이 넘는 탄약을 운반했다. 때로는 부상병들을 후방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미국 해병대 제1사단 소속의 군마 '레클리스(Reckless)'의 이야기다.
최근 출간된 '레클리스'는 미 해병대의 전설이 된 군마 '레클리스'의 이야기를 복원한 책이다. 미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인 로빈 허턴가 레클리스의 실화를 8년간 추적해 썼다. 한국전쟁 참전 생존 해병들과 가족들을 만나 증언을 듣고 레클리스와 관련된 공식 문서, 각종 자료들을 조사해 레클리스의 전기를 다뤘다.
서울에서 태어난 레클리스의 원래 이름은 '아침해'다. 한국전쟁 당시 군마를 찾으러 서울의 경마장을 방문한 미 해병 지휘관의 눈에 총명한 눈빛을 가진 말 한 마리가 들어왔다. 250달러에 거래돼 해병대로 들어간 '아침해'는 '레클리스'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전선을 가로지르는 통신선을 피해 다니는 법, 포격 시 엎드리는 법, 참호로 피난하는 법 등 훈련했고, '무모한'이라는 이름처럼 전장에서 투혼을 보여준다.
레클리스의 뿌리는 '제주'에 있다. 제주마와 영국의 경주마 서러브레이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마인 '한라마'다. 제주마의 피를 이어받아 거친 산길도 흔들림 없이 올랐고 포화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저자는 "제주마에서 물려받은 강인함과 지구력, 서러브레드에서 물려받은 날렵함과 민첩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폭격 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임무를 수행했던 레클리스의 모습은 거친 화산섬의 바람과 돌밭을 견뎌온 제주마의 강인함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었다"며 "미 해병대 병사들은 '레클리스는 단순한 말이 아닌 우리의 전우였고 가족이었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레클리스는 미국 해병대 역사상 최초로 하사 계급장을 받은 동물이 됐고 이후 상사까지 진급한다. 또 미국 퍼플하트 훈장, 유엔 종군 훈장, 미 국방부 종군장 등 10개 이상의 훈장을 받았고 미국 라이프(LIFE)지가 선정한 '미국 100대 영웅'에도 이름을 올렸다. 사람과 다름없는 지능과 감정, 전설적인 전투 활약상, 해병들과 나눈 전우애, 벙커에서의 생활상까지 레클리스의 이야기는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미 본토로 간 레클리스는 1968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어미의 고향인 제주에도 레클리스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황하민 옮김. 도레미. 1만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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